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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일랜드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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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하지만 유럽에서 한국인과 닮은 국민을 꼽는다면 단연 아일랜드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으니 서울대 박지향(서양사) 교수다. 자기 민족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뛰어나다고 믿는 맹목적 애국심, 자신들의 역사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는 한(恨)의 정서, 강대국 곁에서 겪은 수난의 역사 등 닮은 구석이 많다는 것이다. 영국사를 전공하면서 아일랜드에 관심을 갖게 됐고, 아일랜드의 역사에서 우리의 역사를 읽었다는 박 교수는 저서 '슬픈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인이 '하얀 검둥이'란 아일랜드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듯이 일본인은 '두 발로 걷는 원숭이'라는 한국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지적한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만 1000개가 넘게 있다는 펍에 가보면 한국의 선술집에 온 느낌이다. 흑맥주인 기네스를 마시며 흥겹게 떠들고 어울리는 질펀한 분위기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잉글랜드와 뗄 수 없는 관계로 얽혀 살면서도 민족감정 문제만 나오면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모습에서 한.일관계의 현주소를 보기도 한다. 우리에게 북한이 있다면 아일랜드에는 북아일랜드가 있다. 둘 다 식민통치의 유산이다.

그러나 한국과 아일랜드의 비교는 여기서 끝난다. 유럽의 변방이었던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됐다. 2005년 아일랜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만8900달러로 유럽연합(EU) 27개국 중 룩셈부르크 다음으로 많았다. 영국(3만6600달러)을 앞지른 지는 이미 오래됐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세계에서 삶의 질이 가장 높은 나라로 아일랜드를 꼽았다. 영국은 29위였다.

더블린의 중심가인 오코넬가(街)에 가면 120m 높이의 철제 첨탑인 '스파이어'가 우뚝 솟아 있다. 뉴밀레니엄을 기념해 2003년 완공된 이 탑은 불과 20년 만에 유럽의 병자(病者)에서 세계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켈틱 타이거(Celtic Tiger)'의 기적을 상징하고 있다. 지난해 아일랜드는 EU권에서 가장 높은 5.6%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실업률은 EU 평균치의 절반인 4.2%로 사실상의 완전고용 상태다.

지난주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여당인 '피어나 포일'이 승리함으로써 버티 어헌 총리는 3선 연임의 발판을 굳혔다. 완전한 개방과 규제 철폐, 낮은 세금과 각종 인센티브를 통한 적극적인 외자 유치, 정보기술(IT) 등 지식기반 산업에 초점을 맞춘 산업 및 교육, 인력 정책, 사회연대협약을 토대로 한 노사정 합의체제 등 '아일랜드 모델'의 틀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반영된 결과다.

아일랜드인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 집중함으로써 작지만 부강한 나라가 되겠다는 비전을 공유했고, 그 비전에 따라 국가 전략을 짰다. 그리고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를 실천에 옮겼다. 똘똘 뭉쳤고, 화합했다. 그 결과 아일랜드 사람들은 식민지 모국이었던 영국을 뛰어넘어 '행복한 아일랜드'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박 교수는 '슬픈 아일랜드'라는 자학적 이미지가 자기 위안과 도덕적 우월감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이미지에만 매달렸던들 아일랜드의 기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폐쇄적 인식의 틀을 깼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을 뛰어넘는 기적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더블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