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통신|남은 음식 싸가기 운동 벌였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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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얼마 전 친구부부 한 쌍과 시내 큼직한 한식집을 찾은 적이 있는데 상다리가 휠 정도로 많은 음식이 나왔다. 찌개·국이며 반찬만 해도 대충 스무 가지가 넘을 듯 싶었는데 네 명 일행이 먹느라고 열심히 먹어댔지만 반 이상이 남았고 몇 가지 음식은 아예 손도 못됐다. 쓰레기 줄이기 운동, 음식 안 버리기 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요즘 이런 식당이 아직도 있는가 싶어 안타까웠다.
미국인들은 먹고 남은 음식을 싸 주고 또 그것을 받는데 아주 익숙하다. 남편과 함께 미국 유학하던 시절 현지인 가정에 초대받아 가보면 식사 후 남은 음식을 안주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싸 주는 일이 보통이어서『참 실용적이구나』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식당에서도 남은 음식을 싸 달라고 하면 친절하게 포장해 주는 것이 예사고 또 싸달라는 말을 꺼낼 때 주위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도 우리와 다른 점이었다.
유학 당시 전해들은 것 중에 아직도 잊지 못하는 얘기 하나가 있다.
퇴약 볕이 내리 쬐는 어느 날 학비를 벌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미국인 가정의 잔디 깎기 일을 하고 있던 아프리카 출신 남학생에 관한 얘기다. 이 흑인학생은 집주인이 쉬면서 하라고 준 음료수 한잔을 받아 들고 느닷없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음료수 한잔에 뭐 그리 감격하는가 싶어 이유를 물어보니 오랜 가뭄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은 자기 나라 사람들을 생각하니 미국 땅에 넘쳐 버려지는 마실 것, 먹을 것을 모아 모국에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는 대답이었다.
여하튼 미국유학 이후에 밥상 차리는데 되도록 반찬 가지 수를 줄이고 양도 빠듯하게 만드는 버릇이 어느덧 습성화돼 먹성 좋은 남편의 핀잔거리가 하나 늘기도 했다.
음식점에 갔다가 버리는 음식을 보면 괜스레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도 미국에서의 경험 때문에 생긴 증상이다.
한 상 가득 채워 대접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주부들의 의식구조부터 바꾸어야겠지만, 당장에 어렵다면 남은 음식 싸가기 운동이라도 우선 벌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서울 여의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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