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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소리도 없는 독일의 시위(특파원코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경찰·공무원 나와 진지한 토론
지난주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과 함께 가두시위에 참가한 일이 있다.
독일 베를린시내의 유치원 게시판에는 얼마전부터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 유치원 인근도로의 제한속도를 시속 30㎞로 하자」는 학부모들의 시위참여호소 벽보가 나붙었다.
평소 같은 생각을 해오던 터라 기꺼이 참가했다. 독일사람들의 시위에 비록 외국인이기는 하지만 학부모로서 직접 참가한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했다.
플래카드를 만들려다가 너무 거창한 것 같아 고깔모자에 「30㎞」라고 큼지막하게 써 아들에게 씌운 뒤 약속장소로 갔다.
시위장소인 유치원옆 공터엔 30여명의 학부모가 모였다. 그러나 아무도 전단이나 플래카드 등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악을 쓰며 고함치는 사람도 없었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 조용조용 얘기를 주고 받을 뿐이었다.
아들이 창피했던지 고깔모자를 안쓰겠다고 버텨 하는 수 없이 들고 있어야 했다.
이윽고 경찰관과 시공무원 각 1명,그리고 취재기자 2명이 왔다.
그리고는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는 다름아닌 토론이었다. 한시간 가까이 계속된 이들의 토론요지는 『이곳엔 유치원은 물론 국민학교도 있기 때문에 속도제한을 현재의 50㎞에서 30㎞로 낮춰야 한다』는 학부모측 주장에 경찰과 공무원은 『이 도로는 일반도로이기 때문에 당장 시정은 어렵지만 노력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토론이 끝나자 양측은 서로 악수를 나눈 뒤 『쉐네스 보헨엔데』(주말을 즐겁게 보내세요)라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시시하기 짝이 없는 시위였다. 그러나 이튿날 현지 신문엔 토론내용을 다룬 큼지막한 기사가 실렸다.
베를린같은 독일의 대도시에선 거의 매일이라고 할만큼 크고 작은 시위가 자주 벌어진다.
「도심에서 자동차를 추방하자」는 환경단체들의 시위에서 「호네커를 석방하라」는 좌파인사들의 시위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도 다양하다.
한가지 공통점은 대개의 시위가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염병이나 돌·최루탄·쇠파이프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최근 구동독 로슈토크시에서 발생한 극우파들의 외국인 추방촉구 시위같은 폭력시위도 있지만 이는 사회로부터 범죄로 최급되는 일부 집단의 난동일뿐 일상적 시위와는 거리가 멀다.
독일인들이 시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시위문화도 선진화를 추구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베를린=유재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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