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김두우가 본 정치 세상] 그 자리가 뉘 덕인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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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9일 치러진 대선은 우리 사회에 '변화'라는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씨로선 자신을 겨냥한 여권의 몇 가지 폭로가 재판부에 의해 근거없는 것으로 판결난 만큼 "그런 음해가 없었더라면…"하는 생각에 잠 못 드는 밤을 수없이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드러나고 있는 불법 대선자금 내막을 보면 李씨 진영은 시대정신을 잘못 읽고 구태정치를 답습했다. '공신'이었던 김윤환.이기택씨를 공천에서 배제시켜 바람을 일으켰던 2000년 총선 때의 자세를 대선에서 보여줬다면 결과는 달랐을지 모른다.

대선 후 1년이 지났다. 지금 정치권은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둘러싸고 생사를 건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국민의 정치인에 대한 혐오감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면 현재의 정치권이 대선의 메시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최소한 정치 지도자의 면면은 달라졌다. 과거엔 어림도 없어 보이던 인물들이 정치의 전면에 서게 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에 입문한 이래 한번도 주류에 속하지 못했다. 여당이었을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야당이었을 때에도 핵심에 서 본 적이 없다. 대선 6개월 후 치러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최병렬 대표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부에 있을 때엔 청와대 정무수석과 노동부.문공부 장관, 서울시장을 지냈다.

그러나 정치에 입문해서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1997년 7월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7명 중 7등을 했다. 지난 11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된 조순형 의원도 비슷한 경우다. 5선의원에 유석 조병옥 박사의 아들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론 뾰족한 당직 하나 맡아 보지 못했다. 더구나 사람들 앞에 서면 수줍어하고 어색해하는 모습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정치인 이미지와는 괴리가 있다. 2000년 8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선 15명 중 13등을 했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자기 주장이 강해 때로 고집스러워 보인다. 정치자금을 마련해 계보를 관리하지도 않았고, 이 때문에 당내 경선에선 꼴찌에 가까웠으며 비주류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 崔.趙대표가 대표로 선출된 것은 시대의 흐름이, 또 당이 그들의 상대적으로 깨끗한 이미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김근태 의원이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얼굴은 바뀌었는데 정치행태는 왜 그대로인가. 윤순임 서울정신분석상담연구소장은 "그들이 시대정신의 껍질만 보고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지난해 6월 월드컵 대회를 계기로 우리 국민은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노래방 문화에서 축제문화로, 나르시시즘 사회에서 공동체 사회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수십년간 DJ(김대중 전 대통령)를 짓눌렀던 레드 콤플렉스를 붉은 악마가 한방에 날려버렸고, 태극기의 신성불가침성은 응원단의 패션이 무너뜨렸다. 이들은 자신을 향하지 않고 공동체를 지향했기에 이런 변화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새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등장이 시대변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어느 순간 망각한 듯하다. 청년실업률 8%에 자살률 4위인 나라,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하는 곳, 수백억원의 현금이 차떼기로 넘어가는 사회는 우리가 지향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서로를 인정하는 다원화 사회, 함께 사는 공동체의 삶, 낡은 정치의 청산, 정치권이 이런 것들을 외면한 채 편갈라 싸우는 데만 몰두한다면 내년 4월 총선에서 성난 민심의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김두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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