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세탁소만큼 많아진 대부업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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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 21일 오전 서울 동대문상가의 한 매장. 옷장사를 하는 홍모(28)씨는 생활정보지를 열심히 뒤져 대부업체 광고를 찾았다. '급전 환영'. 홍씨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다른 대부업체로부터 진 빚을 '돌려막기' 위해서다. 1년 전 홍씨는 의류 구입 자금으로 500만원이 필요해 은행 문을 두드렸다. 연체가 없어 대출이 쉬울 것으로 예상했지만 은행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고정 수입'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어쩔 수 없이 대부업체의 문을 두드렸다. 이자가 65%로 높았지만 금세 갚으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장사가 안 돼 빚을 제대로 갚을 수 없게 됐다. 결국 다른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이자는 눈덩이처럼 늘었고 그동안 3개 대부업체로부터 빌린 돈은 900여만원으로 불어났다.

홍씨 같은 '신용 경계인'이 대부업체로 몰리고 있다. '신용 경계인'이란 신용대출금을 연체하지는 않았지만 은행이나 신용카드사에서 대출받기 어려운 신용 상태에 있는 이를 가리키는 신조어. 현재 480여만 명에 달하는 신용 경계인 상당수가 연 이자율 66%에 달하는 대부업체 빚을 갚지 못해 제2의 신용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재정경제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대부업 시장 규모는 약 18조원으로 이용자는 329만 명에 달한다. 한 대부업체 관계자는 "대부업체 이용자 대부분이 은행에서 대출받기 어려운 신용 경계인"이라며 "대부업 이용자가 올해는 30%가량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현재 등록한 대부업체는 전국적으로 1만7500여 곳이다. 미등록 업체까지 합치면 4만 곳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대부업이 '돈'이 된다는 판단에 따라 최근에는 메릴린치.스탠다드차타드 등 세계 굴지의 금융회사까지 속속 뛰어들고 있다.

◆세탁소만큼 많아진 대부업체=서울시의 경우 2003년 말 2541개였던 등록 대부업체 수는 올해(21일 현재) 6496개로 급증했다. 지난해 초 이후 서울시에만 하루 평균 5개가량의 대부업체가 새로 생겨난 셈이다. 이는 서울에서 영업하는 이발소(4523개, 2006년 기준)보다 많고, 세탁소(7022개)와 비슷한 수치다. 전국의 은행 본점.지점 수(6125개)보다도 많다.

대부업체는 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관리.감독은 '구멍' 투성이다. 현재 총 1만3000여 개(미등록 업체 포함)로 추정되는 대부업체를 관리하는 서울시 인력은 4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한 명은 올해 새로 충원했다. 다른 지자체도 사정은 비슷하다.

반면 대부업체는 즐거운 비명이다. 고객이 몰리면서 대부업체에는 상담 없이 고객이 스스로 신용상태를 입력하고 각종 대출 서류를 제출하는 '무인 대출기'가 등장하는가 하면 인터넷 대부업체까지 등장했다.

◆신용 경계인이 위험하다=한국신용정보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3467만 명의 금융서비스 이용자 가운데 신용정보관리대상자(옛 신용불량자)는 아니지만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대출받기 어려운 신용 경계인(10등급 가운데 7~9등급)의 수는 484만 명(14%)이나 된다.

신용 경계인의 대부업체 이용이 크게 늘면서 '대부업체발(發)' 신용위기가 터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현 상황이 2002년 신용위기를 불러왔던 '카드 돌려막기'와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신용 경계인이 한번 대부업체를 이용하면 신용점수가 나빠지면서 사실상 제도권 금융회사를 다시 이용하기 어렵게 된다. '제도권 금융 대출 거절→대부업체 이용→신용점수 하락→제도권 금융 진입 불가'라는 악순환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신용경계인에게는 언제든 한계상황이 닥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현대경제연구소 박덕배 연구위원은 "대출상환 의지가 분명한 금융 소외층에 대해 집중 지원책을 마련하는 등 선제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창규.손해용 기자

◆신용 경계인=생활보호대상자 바로 위인 차상위계층과 비슷한 개념으로 신용정보관리대상자(옛 신용불량자)는 아니지만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대출받지 못하는 금융 소외계층을 말한다. 보통 연체는 없지만 은행에서 대출해 주기 어려운 경계선상의 신용등급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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