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도의 '슈바이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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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8시 서울역 지하보도. 영하 5도의 추위에 노숙자 30여명이 발을 동동 구르며 길게 줄을 서있다. 매달 셋째주 목요일이면 자원봉사자와 함께 무료 진료하는 S피부과 신학철(申學徹.50)원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申씨는 노숙자들의 혈압을 재고 증상을 물어본 뒤 약을 처방하거나 상처에 소독약을 발랐다. 3년째 서울역에서 노숙 중인 金모(62)할머니는 약을 받으면서 연신 "정말 고맙다"며 인사했다.

진료를 하며 입김으로 언 손을 녹이는 申씨는 "아무리 추워도 장갑을 안 낀다. 노숙자들이 혹시라도 자신들의 몸이 더러워 장갑을 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숙자들은 주로 위장병.간경화.신경통.피부병을 호소했다. 대부분 두세 가지의 병을 달고 산다. 그가 마련한 30만원어치의 약품은 금세 동이 났다. 그가 서울역을 처음 찾은 것은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겨울. 그때는 하루 1백50명가량을 진료했다. 그러다 지난해에는 진료받는 노숙자가 80~1백명으로 줄었는데, 최근 다시 1백20~1백50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이날도 한 시간 만에 1백20명이 다녀갔다.

申씨는 "몇년 전만 하더라도 노숙자들이 재기의 희망을 잃지 않았는데, 요즘은 자포자기해 알코올 중독이 된 경우가 많다"며 "가장 시급하게 치료해야 할 것은 마음의 병"이라고 말했다.

申씨의 무료 진료는 90년에 시작됐다. 중령(군의관)으로 예편한 뒤 개업한 그의 병원에 한 시각장애인이 찾아왔다. 안됐다 싶어 진찰료 2천원을 돌려주자 그는 "나를 뭘로 보느냐"며 화를 냈다. 申씨는 그때 "편히 앉아서 동정심을 보이기보다 병든 이웃을 직접 찾아가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 따르면 한해 4백여명의 노숙자가 각종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으며, 평균 사망 연령은 48.3세다. 한림대의대 산업의학팀은 노숙자 사망의 주원인이 ▶손상.중독.외인성 질환(34.1%) ▶간장 질환(13.4%) ▶악성 종양(12.4%) ▶순환기계 질환(11.5%) 등이라고 밝혔다.

한편 인의협은 19일부터 23일까지 서울역과 영등포역에 영좌를 설치하는 등 거리에서 쓸쓸히 숨진 노숙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연다.

이철재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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