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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상성' 진실과 우정 사이 … 삶은 상처투성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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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 남자, 눈빛이 깊다. 외롭고 쓸쓸해 보이지만 도통 속에 있는 말을 하지 않는다. 엄청난 비밀을 가슴에 묻어둔 채 평생을 살아왔다.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료에게도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다. 홍콩의 스타 량차오웨이(45.梁朝偉)가 연기한 '상성: 상처받은 도시'의 주인공 유정희다. 진청우(34.金城武)는 유정희의 비밀을 파헤치는 상대역 아방으로 나온다.

'상성'은 범죄영화지만 전형적인 범죄물의 틀을 따르진 않는다. 범인의 실체를 향해 단서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게 아니라 아예 초반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드러낸다. 사건보다는 인물의 심리에 주목하기 위해서다. 살인사건으로 죽은 피해자보다 살아있는 가해자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진다. '무간도'시리즈의 류웨이창(劉偉强).마이자오후이(麥兆輝)감독이 이번 영화에서도 공동으로 연출을 맡았다.

유정희는 밖에선 성실한 엘리트 경찰이고, 안에선 한없이 다정한 남편이다. 어느 날 엄청난 재산을 지닌 장인이 강도에게 잔혹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후 영화는 범인을 추적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러나 감독은 스쳐 지나가는 화면으로 관객에게 미리 범인을 알려준다. 바로 유정희다. 극중 인물은 모르고 관객만 아는 사실이다. 그는 왜 장인을 죽였을까. 이때부터 관객의 궁금증은 여기로 집중된다.

경찰은 단순 강도사건으로 단정하고 적당히 사건을 덮으려 한다. 공교롭게도 유정희가 담당 형사의 지휘 책임자다. 유정희의 아내 숙진(쉬징레이)은 경찰을 믿지 못하고 남편이 가장 아끼는 후배이자 사립탐정인 아방에게 사건의 수사를 의뢰한다. 아방은 몇 년 전 애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경찰을 그만둔 뒤 폐인처럼 살고 있다. 바로 수사에 착수한 그는 직감적으로 유정희가 살인에 깊게 관련돼 있다는 냄새를 맡는다.

수사가 진전될수록 유정희의 혐의는 짙어지지만 더불어 아방의 고민도 깊어간다. 유정희는 바로 친형처럼 믿고 따르는 선배이기 때문이다. 그는 선배에 대한 인간적인 정과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사명 사이에서 번민하다 마침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상처받은 도시'란 부제가 말해주듯 영화는 냉정하고 우울한 도시 분위기를 배경으로 인간 내면의 상처를 조명한다. 마이 감독은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중국 본토에서 많은 사람이 저마다 슬픈 사연을 안고 들어왔고, 2003년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의 피해가 심각해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았다"며 "이 도시에서 벌어진 슬픈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량차오웨이는 당초 아방 역에 캐스팅됐지만 유정희를 연기할 마땅한 배우가 나타나지 않자 감독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배역을 바꿨다. 그로선 연기생활 25년 만에 처음으로 악역을 맡은 것이라고 한다.

영화는 존속살해라는 소재나 범인을 일찌감치 드러내는 기법 등에서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시리즈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공공의 적'은 간교한 악한과 선한 경찰(또는 검사)의 대결 끝에 결국 선이 승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상성'에선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게 표현된다.

'공공의 적'이 선.악 이분법의 단순한 세계를 보여준다면 '상성'의 세계관은 훨씬 복잡하다. 세상을 무간지옥에 비유한 '무간도'처럼 불교적 분위기도 엿보인다. 영어 제목('Confession of Pain')은 천주교에서 신부에게 죄를 고하는 고해성사를 암시한다.

다만 줄거리가 비교적 단순하고 반전도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상성'의 약점으로 꼽을 수 있다. 부모를 잃은 소년이 열심히 무공을 익히며 자라나 원수를 갚는다는 설정은 무협지에서 지겹게 봐왔던 것인데, 이 영화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엿보인다.

외국 관객이 홍콩 반환 이후 현지 주민들의 내면적 상처를 이해하는 것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다. 31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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