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는 새로운 문명의 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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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26면

강정현 기자

서부 유럽에서는 세계화를 반기는 사람이 많지 않다. 특히 프랑스는 세계화에 대해 부정적이다. 학자나 정치인은 국가의 정체성 상실이나 문화 수준 저하, 고용 불안정 등을 거론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사회적 지위 상실이라고 생각한다. 세계화는 권력 재분배, 세대 간의 갈등, 무산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세계화는 사회ㆍ경제적 약자인 국가나 개인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기득권자나 구태의연한 국가, 편협한 학자, 국수주의자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기 소르망 문명비평가

세계화와 자유무역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세계화는 보다 복합적이고 광범위한 혁명이다. 세계화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바꿔놓는다. 자유로운 사고의 유통으로 인해 우리들은 보다 신기한 사고와 행동 양식에 접하게 된다. 세계가 확장되고 변화하는 가운데 우리는 더 많은 여행을 한다. 이 같은 여행으로 인해 세계화는 관념이 아니라 물리적인 경험이 된다. 세계화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포용력ㆍ격식탈피ㆍ평등주의 같은 규범을 개인이나 집단에 부과한다. 이런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옛날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규범은 모든 나라의 정치에 영향을 준다. 민주주의를 안 하고는 못 배기게 된다. 새로운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의 틀 안에서 여론은 권위주의와 봉건주의를 배척한다. 승자는 국민이요, 패자는 권위주의적 통치자다. 예를 들어보자. 닫힌 세계에서는 국가 지도자들이 즉흥적 정책 추진을 위해 화폐를 함부로 찍는 일이 가능했다. 그 피해자는 인플레이션으로 고생하는 국민이었다. 오늘날 이런 식의 정책수행은 불가능하다. 국민은 보다 안정적인 화폐정책을 바란다. 세계화는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세계화 때문에 그 어떤 조직도 지시만으로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마찬가지로 국제관계도 세계화의 영향을 받는다. 인권 존중과 법적인 세계 질서라는 관념 때문에 과거와 달리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수단ㆍ이라크ㆍ콩고 등지의 참상이 말해주듯 세계는 절대로 평화스러운 곳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에 접근했다. 군사충돌이 발생하면 국제사회가 신속하게 반응해 폭력의 전개 속도를 늦춘다. 유엔은 완벽하진 않지만 그 존재 자체가 독재자들의 침략 욕구를 억제한다.

이러한 새로운 행동양식과 규범은 전 세계적인 것일까 아니면 그저 미국적인 것일까? 세계화는 미국화를 의미하는가? 우리가 전 세계적이라고 간주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미국산(産)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미합중국이란 무엇인가? 미국은 전통적인 의미의 제국주의 국가이자 국경 없는 세계를 수립하는 프로젝트의 추진체다. 한편 새로운 세계정신은 비서구 문화로부터 많은 것을 빌려왔다.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분야로 미학이나 음악을 들 수 있다. 이들 분야에서 아프리카의 리듬과 아시아의 디자인이 집단행위와 산업양식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세계적 신사조인 페미니즘과 환경주의의 바탕에도 아시아적 가치가 있다. 또한 아시아 기업가들의 성공을 보면 기업가정신은 서양 고유의 것도, 그리스도교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화는 유교권에 존재하고 있기는 했으나 그동안 봉건주의가 억압해왔던 창조력을 해방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과거 이슬람은 개인주의와 기업가정신에 기반한 문명이었다. 서양의 식민주의와 독립 후의 독재 때문에 그 전통이 단절됐다. 미래엔 현재 잠자고 있는 아랍세계의 창조성이 해방될 것이다.

세계화라는 프로젝트는 인류에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그 좋고 나쁨을 따지기 위해 문화ㆍ경제ㆍ평화 분야를 살펴보자.

세계화 덕분에 인류는 인류 전체의 문화자산을 역사상 최초로 공유하게 됐다. 세계의 문화보고에 대한 접근성이 확대돼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은 보다 풍성하게 됐고 복수 정체성이 특징인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뿌리와 계속 연결돼 있지만 우리의 개성과 경험은 보다 다양하게 됐다. 많은 한국인도 복수 정체성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서양문화와 한국 전통을 융합하고 있다. 이들은 진정한 문명이란 살아있는 문명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문명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세계와 상호 작용하는 한국문화는 그 어느 때보다 생동감 있다.

경제적 보호주의도 타당치 않다. 세계화에 따른 지속적 경제성장은 수십억의 사람들에게 이익을 안겨줬다. 자유시장 덕에 수많은 사람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있다. 아직 경제가 세계화되지 않은 아프리카나 중동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빈곤이 사라지고 있다. 경제 세계화에 대한 정당한 비판도 있다. 하지만 경제에서는 오로지 사실만을 고려해야 한다. 자유경제가 그 어떤 다른 경제체제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2006년은 자유무역 덕분에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성장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해였다. 인도와 중국만 봐도 양국 정부가 개방을 선택한 바로 그 순간부터 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났다. 반대로 세계화에 반대하는 북한은 경제적ㆍ사회적으로 파탄했다.

세계화를 지지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세계화가 보다 평화로운 세상의 도래를 앞당기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처음 개진한 사람은 유럽연합의 정신적 창립자인 장 모네다. 모네는 외교관과 정치인이 지난 1000년 동안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모네는 대안으로 자유무역을 제시했다. 그의 주장은 옳았으며 그의 방식은 라틴아메리카 같은 지역에도 적용됐다. 언젠가는 한국ㆍ중국ㆍ일본도 아시아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비슷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세계화가 안겨주는 이런 문화적ㆍ경제적ㆍ외교적 혜택을 기반으로 우리는 인류 역사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새로운 전 지구적 문명이 싹트고 있다.

정리=김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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