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왕’ 한국인들, 말하기는 ‘버벅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0호 08면

우리가 유학을 가기 보다 세계인들이 우리 나라로 더 많이 유학 오는 시대가 와야겠다. 하버드 대학 교내에 있는 설립자 존 하버드의 동상. 중앙포토

“한국에선 그렇게 안 배웠는데….”

미국서 영어 공부 해보니

지난해 여름부터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언론대학원에서 연수 중인 기자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인근 지역사회대학(community college)에서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과정을 수강했다. 그러나 수업 도중 한국에서 배운 것과는 다른 내용을 종종 접하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때마다 담당 교사인 르네 카푸토는 “많은 한국 학생이 비슷한 얘기를 한다. 하지만 이게 대다수 미국 사람이 말하고 쓰는 방식이니 그대로 알아두면 좋지 않을까”라고 조언해주곤 했다.

기자는 이른바 ‘성문종합영어’ 세대다. 대부분의 30~40대와 마찬가지로 학창시절, ‘성문~’로 시작되는 참고서 시리즈를 들이파는 게 영어공부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어학 연수나 유학 경험이 없는 `토종` 한국인들에게 성문으로 다져진 문법은 영어의 기초체력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막상 미국에 와서 공부해보니 그 기초체력이 ‘약’인 동시에 ‘독’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세계 각국 학생이 모인 ESL 수업시간에 ‘문법왕’의 자리는 당연히 한국인들의 차지다. 문법적 지식을 바탕으로 영어 문장을 완성하는 문제를 풀거나 독해를 할 때는 펄펄 난다. 반면 그 문법적 틀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바람에 말하기에선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무슨 말을 하려면 머릿속에서 ‘자, 주어 먼저 놓고 동사 갖다 붙이고… 참 시제는 뭘로 해야 되나’하고 이리저리 따져보느라 입으론 버벅거리기 일쑤다.

문법적 기초는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등 전반적인 영어 실력을 키워나가는 데 필수조건이다. 다만 문법에 발목이 잡혀 다른 영역에서의 진도가 안 나가는 걸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인들이 매일 쓰는 구어체 영어엔 한국에서 배운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 수두룩하다. 이런 건 토를 달지 말고 그냥 외워서 익히는 수밖에 없다. “Got any plans for tonight?(오늘 밤 무슨 계획 있어?)”하고 묻는데 “어, 이게 원래는 ‘Do you have any plans?’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언어란 고정된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습관이 모이고 쌓여서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기자를 포함한 한국인들이 신주단지처럼 붙들고 있는 문법적 지식 자체에도 문제가 많다. 한국에선 ‘A=B’라고 단순 무식하게 배웠는데 알고 보니 때에 따라 달리 적용해야 하는 예외가 달린 경우가 부지기수다. 일례로 ‘coffee는 한 개, 두 개 식으로 셀 수 없으니 반드시 한 잔의 커피(a cup of coffee)라고 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미국에서 그렇게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저 “커피 주세요(Coffee please.)”나 “나 커피 마시고 싶어(I’d like some coffee.)”라고 한다. 혹은 “누구 커피 마실 사람 있어?(Who wants a coffee?)”처럼 부정관사(a)를 붙이기까지 한다. 그러니 쫀쫀하게 문법 따지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쓰는지를 살펴 부단히 배우고 익힐 수밖에.

문법책만, 그것도 불완전한 내용의 교재를 들이파는 한국식 영어공부 방법엔 절대적으로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 식으론 백날 공부해도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의사소통하기 힘들다. 한국 사람들이 듣는 ‘문법과 독해에 강하다’는 칭찬은 뒤집으면 ‘말하기와 쓰기는 안 된다’는 소리다. 실제로 기자가 다닌 커뮤니티 칼리지의 교사를 포함해 이 지역 학교의 ESL 교사들 의견도 그랬다. 다른 나라 학생들에 비해 한국 학생들은 영어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데 한계가 많다는 것이다. <표 참조>
그럼 어떻게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연습이 최고”란 말이 정답일 것이다. 말하기 능력을 키우자면 가능한한 자주 원어민과 접촉하며 스스로 공부한 표현을 실제로 써봐야 한다. 원어민을 자주 접촉할 기회가 없는 한국에서라면? 영어로 된 TV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자주 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ESL 교사들은 입을 모았다. 현실에 가까운 상황 설정, 등장 인물마다 각기 다른 음성과 악센트, 최신의 구어체 영어 표현들을 접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교재가 없다는 것이다. 기자와 ESL 수업을 함께 들었던 19세 스웨덴 소녀 에마 피어슨의 경우를 봐도 이 말이 맞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양과 질에서 스웨덴 공교육의 영어수업 방식이 한국보다 한 수 위라는 점을 인정한다 쳐도 원어민과 별 다름없는 그녀의 영어 구사 능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비결을 묻자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미국 TV 프로그램을 즐겨 보며 미국식 영어 표현과 악센트, 리듬을 익혔다”고 했다.

영어 작문을 잘하기 위해선 많이 써보는 게 최고라고 ESL 교사들은 말했다. 특히 매일 짧게라도 일기를 쓸 것을 권했다. 일기 속에서 자신이 새롭게 배운 영어 표현이나 문법 지식을 활용해 보라는 것이다. 영어로 일기를 쓰다 보면 머릿속에서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 영어로 생각하고 또 영어로 생각한 것이 바로 글과 말로 튀어나오는 훈련이 저절로 된다고 했다. 또 일기를 쓸 땐 문법적으로 틀릴까를 두려워하지 말고 일단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뒤 두 번, 세 번 퇴고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바로잡아 나가는 게 바람직하단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