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무부,일제때 위안부실태 조사 보고서 요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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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노예사냥하듯 끌고갔다”/“일자리 준다” 속여… 인신매매수법 사용/41년 북만주에 8천여명 동원하기도
◇군대위안소의 설치=1918년 8월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의 러시아여성에 대한 강간사건이 빈발해 성병이 만연했다. 32년 1월 제1차 상해사변과 37년 노구교사건 때도 일본군병사의 강간사건이 현지주민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따라 군대가 직접 전면적으로 개입해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군대전속의 위안부 집단을 창설했다.
◇초기의 대표적 위안소(상해)=목조바라크 10동정도로 각동은 다타미 4장반 정도의 작은 방 10개로 돼있고,관리동과 함께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조였다. 각 방은 나무판자문에 방안에는 침대가 하나씩 놓여있고,가로 30㎝,세로 50㎝의 창이 하나 있었다. 창 아래쪽 3분의 2는 칸유리,상부는 투명유리였다.
◇위안부 모집=32년 최초로 군대위안소를 설치할 때는 군부대 주변의 용달사,혹은 매춘업자에게 위탁해 주로 직업매춘여성에게 상당액의 전도금을 주고 오사카 등지에서 모집했다.
그러나 37년 남경대학살이후 군이 본격적으로 군대위안부 정책을 채택하자 직업여성은 성병을 전염시켜 전력을 상실시킬 우려가 있고,일본내 대량의 위안부모집으로 문제가 야기되자 군부와 업자는 위안부를 한국으로부터 충원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술 혹은 위압적 분위기에 의한 모집=38년까지는 주로 도시지역에서 여공모집,식당종업원 모집 등의 전형적인 인신매매 수법으로 모집한 것으로 보인다. 38년 이후 40년까지는 업자가 군의 허가하에 헌병·경찰·면장 등의 도움을 얻어 주로 빈곤한 농부의 딸들을 특지 간호부·군간호보조원 모집 등의 명목으로 꾀어 모집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경찰이나 면장 등이 업자와 동행함으로써 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들거나 희생자들이 업자의 말을 쉽게 믿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동원에 의한 모집=41년 7월 「관동군 특별대연습」이 개시돼 8월초에 약 70만명의 병력이 북만주에 집결했다. 이 동원계획에 위안부 동원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관동군사령부가 조선총독부에 의뢰,8천명 정도를 동원했으며,그중에는 대련 등에 있던 일본인 매춘부도 있었다.
총독부는 도·군·면에 동원명령을 은밀히 하달하고 면장의 책임하에 동원하도록 했고,이때 사용된 수법은 군부대에서의 잡역·간호보조·군수공장 여공,혹은 여자특수군속이라고 속인 것으로 추정된다.
▲인간사냥 방식의 도입=43년께부터 위안부 동원에 상기의 방법이 통하지 않자 19세기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를 사냥한 것과 비슷한 수법의 사람사냥으로 위안부를 충원하기도 했다.
▲근로정신대와 위안부=근로정신대는 위안부와 성격이 다르며 위안부로 되었을 가능성도 그다지 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위안부를 모집할 때 반문명적 모집행위를 호도하기 위해 「정신대」라는 명칭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고,정신대가 공장 또는 그 주변에서 사술이나 인간사냥의 수법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간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송·배치=인신매매같은 사술적 방법에 의할 경우 업자가 여관 등에 감금했다가 숫자를 채워 데려갔다. 사실상 동원시에는 경찰·군대·관의 유기적인 협조하에 비어있는 창고,휴업중인 요정·백화점·군부대 창고 등에 집합시켜 수송했다.
업자의 위안부는 「화물」로 취급됐다. 서울에서 북상하는 군용화물열차로는 만주·중국으로,부산·목포·인천 등지에서 떠나는 군용수송선으로는 시모노세키·구레 등을 거쳐 상해·항주·버마·필리핀·오키나와·수마트라·라바울·트랙섬 등 기타 남양군도로 수송됐다.
군부대가 이동하면 그 부대에 소속된 위안부도 함께 이동했다.
아무리 오지라도 위안부가 배치되지 않은 부대는 거의 없었다. 현지의 주둔지에 도착하면 취사계·위생병이나 주보계의 상사 혹은 회계소위의 지휘·감독아래 들어간다.
◇위안소 관리=대체로 37년께 내지 38년초까지는 군이 직접 위안소와 위안부를 관리한 것으로 보이나 38년 이후에는 형식적으로 경영은 업자에게 맡기는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업자는 군대의 지시사항을 철저히 실행하는데 지나지 않았고,군속처럼 취급됐을 것으로 보인다. 위안부 모집은 군의 허가가 있어야 하고,위안소 개설,휴·폐업,위안부 숫자,위안부 귀환,가격,위안부와 업자간의 수익분배,영업시간 등 모든 것을 군이 결정했다.
◇위안부의 생활여건=위안부는 일반적으로 외출이 금지되고 관리부대장의 허가없이는 지정된 지역을 떠날 수 없었다. 위안부 1명이 하루평균 10∼20명의 군인을 상대했다. 수입은 업자가 60%,위안부가 40% 정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도 업자는 포주가 매춘부를 착취하는 갖가지 방법으로 위안부의 수입을 가로챘다.
위안부의 수입에서 세금이 공제됐고 이를 군사우편저금의 형식으로 저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국인 위안부의 경우 현금을 손에 넣는 것은 어려웠고 군표로 받은 뒤 패전과 함께 쓸모없이 되었다.
◇귀환=전쟁말기 공습이 심해지자 군부대의 참호나 영내의 진지로도 불러들여졌으며,이때 위안부 역할외에도 세탁·잡역·간호 등의 사역도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패주전에 종군간호부와 위안부를 미리 소개시킨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 경우 주로 소개대상은 일본인이었고,한국인위안부에게는 철수사실을 알리지 않은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막바지에 살아남아 「조선인회」「고려인회」 등 한국인 동포단체에 조직된 경우에는 군정당국의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연합군사령부의 조치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언어소통의 문제와 여자인 점 때문에 귀환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치심으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오키나와·태국·베트남·대만 등지에 남은 예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 온 이후에도 대부분 고향에 가지 못하고 전력을 숨겼다. 결혼해도 대부분 임신이 불가능했고,결혼생활이 불행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정신적·육체적 고통속에서 빈한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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