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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9. 전남 승주군 조계산 선암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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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7~8년 전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중앙일보에서는 각계 인사들에게 '내 마음속의 문화유산 셋'이라는 릴레이 특집을 기획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첫째로 한글, 둘째로 백자, 셋째로 산사(山寺)를 꼽고 백자 중에서는 금사리 달항아리를, 산사 중에서는 조계산 선암사를 대표격으로 내세웠다. 산사!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3분의 2가 산이다. 낮은 구릉과 겹겹의 산자락이 연이어 있어 국토 어디에서도 반듯한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 자연조건으로 인하여 우리는 늘 산과 함께 살아오고 있다.

마을의 앞산과 뒷산, 도시의 남산과 서산처럼 보통명사 같은 산 이름들이 마냥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산을 대하는 우리네 심성의 반영이다. 또 우리에겐 금강산.지리산 같은 명산(名山)의 개념이 있고, 그저 먼 산이라고 말하는 일상 밖의 산도 있다. 심산유곡이라는 깊은 산골의 깊은 골짜기란 잠시 세상사를 훌훌 털고 다녀오고 싶은 마음의 위안처다. 어떤 경우든 우리에게 산이란 결코 위압적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가슴 같은 존재다.

그리고 우리의 산에는 거의 반드시 산사가 있다. 4세기 말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에만 해도 절집은 도심의 한복판에 세워졌다. 그러다 7세기 신라가 통일한 뒤 변방마다 큰 절을 세우는 화엄 10찰의 등장, 그리고 9세기 선종의 유행과 함께 구산선문(九山禪門)이 개창된 이래 산사의 전통이 확립되어 오늘날 근 1천 곳의 산사를 헤아리고 있다.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는 산사의 나라다.

산사는 창건시기, 산세의 조건에 따라 그 규모를 달리하고 있지만 대개는 대중의 기도처와 승려의 수도처를 겸하는 것이 가람배치의 기본 정신이다. 기독교에서 교회와 수도원을 분리했던 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 결과 산사는 금당(기도처)을 우뚝하게 세우고 앞마당 좌우로 선방(수도처)과 요사채(생활공간)를 배치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리고 사세(寺勢)에 따라 만세루(萬世樓).명부전.관음전.산신각 등 당우(堂宇)를 더하며 그 규모와 기능을 확대한다.

조계산 선암사 역시 그런 산사의 기본 가람배치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나 선암사의 대웅전은 다른 절집의 금당처럼 권위적이지도 않고 장엄하지도 않다. 지금 선암사에는 20여 동의 건물이 차곡차곡, 옹기종기 들어차 있는데 이 건물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기능적으로 분리되어 부분과 전체, 전체와 부분의 조화가 아주 자연스러우면서 슬기롭다.

선암사의 20여 건물들은 몇 개의 권역으로 분리되어 대웅전 영역, 심검당 영역, 설선당 영역, 무우전(無憂殿: 내방객을 위한) 영역, 달마전(선방) 영역, 종무소(사무소) 영역으로 나뉜다. 그리고 각 영역을 잇는 동선상에는 팔상전.권통전.천불전.불조전(佛祖殿).해천당.장경각.대변소(大便所: 뒷간) 등 단독 건물이 포치되어 마치 크고 작은 한옥으로 구성된 안동 하회마을이나 안강 양동마을을 집약해 놓은 듯한 건물배치가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각 영역과 건물을 잇는 길과 마당은 뒤안길도 같고 골목길도 같고 대로변도 같다.

선암사의 각 영역과 건물을 조화롭게 연결시켜주는 데는 조경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선암사는 1년 3백65일 꽃이 지지 않는 절이다.

요즘 같은 한겨울에도 동백꽃이 짙푸른 잎새 사이로 수줍은 듯 피어나고 먼나무의 '사랑의 열매'는 빛깔 없는 이 계절에 선홍빛 악센트가 되고 있다. 선암사는 아열대성 기후가 있어 중부지방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매화.파초.팔손이.남천 등이 길가와 마당의 화단에서 아무렇게나 자란 듯이 피어나고 있다. 조경학자 정동오 교수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선암사에는 크고 작은 22개의 꽃밭에 80여종의 조경 식물이 재배되고 있다.

선암사에는 유난히 아담한 연못이 많다. 사찰 경내로 흐르는 두 줄기 물길을 그대로 이어받아 연못에 잠시 가두어 물살을 약화시키는 기능과 함께 시각적으로는 아늑함을, 청각적으로는 청량함을 동시에 연출해 준다.

가장 위쪽 차밭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달마전의 유명한 4단 다조(茶槽)에 걸러지고 이것이 삼성각 앞 방지(方池)와 설선당 옆 쌍지(雙池)를 거쳐 일주문 옆 지원(池苑)으로 흘러들고 여기서 작고 가는 폭포가 되어 낙숫물 소리를 일으키며 계곡으로 합류한다. 그리고 또 한 줄기는 일주문 아래 삼인당(三印塘)이라는 타원형의 연못에 잠겼다가 계류로 흘러드니 선암사는 물이 마르는 날도 없고, 졸졸, 콸콸, 뚝뚝 흐르는 물소리가 그치는 때도 없다.

모든 면에서 선암사는 자연과 종교와 인간이 행복한 조화를 이룬 사랑스럽고 평안하고, 아름다운 산사다. 선암사에서는 절대자의 근엄함과 절대자의 인자함과 절대자의 친절함이 그렇게 빠짐없이 구현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수많은 산사 중 선암사가 유독 조선건축의 진면목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음은 20세기 후반 전국의 모든 사찰이 화려하게 중창될 때 선암사만은 조계종.태고종의 소유권 분쟁과 적당한 가난으로 손을 대지 못했음에 있었으니 이런 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1994년 제 1회 광주비엔날레 때 커미셔너로 참가했던 나는 외국인 커미셔너 네명을 데리고 선암사로 갔다.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그들에게 우리 문화유산의 위대한 전통을 자랑하고 싶어서였다. 광주를 떠나 구례.곡성.순천으로 가는 옛길을 택하여 압록강(일명 보성강)을 지나는데 미국인 커미셔너 캐서린 할브라이시는 강 건너 먼 산을 가리키며 한국의 산들이 저처럼 겹겹이 펼쳐지는 것이 퍽 인상적이라며 동양의 산수화에서 산을 왜 그렇게 그리는지 이제 알게 됐다고 탄미의 감상을 말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저런 산을 높은(high) 산이라고 하지 않고 깊은(deep) 산이라고 말한다고 하자 그녀는 나의 억지 영어에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선암사 진입로 산죽밭부터 걷기 시작하여 승선교.강선대를 지나 경내 마당과 뒤안길.골목길을 거닐며 20여 당우를 둘러보는 동안 그녀는 시선을 어디에 고정시킬지 몰라 분주히 움직이며 연신 "팬태스틱"을 연발했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건축사적으로 유명한 명작들은 모두 고유한 자기만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피라미드.파르테논 신전.샤르트르 성당.타지마할… 그리고 디테일이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강합니다. 그런데 선암사는 건축의 중심 축이 보이지 않아 고정된 단일 이미지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절 전체를 돌아본 평면.입면, 그리고 주위 산과의 어울림이 이 절의 고유 이미지가 됩니다. 나는 부분의 조화로 전체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건축은 여기서 처음 보았습니다. 당신네들은 이런 건축을 깊은(deep) 건축이라고 합니까?"

깊은 산 속의 깊은 건축. 선암사는 정녕 우리네 산사의 미학이 갖는 진수인 것이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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