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80)형장의 빛(15)무기수 김병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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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경북 금능군 청암사에서 30리 더 걸어가면 스님들의 기도 처로 유명한 수도 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수도산 정상은 가야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경치와 단풍이 뛰어나다.
입산 후 1년이 지난 59년 늦가을 나는 수도암에서 진허 스님을 모시고 있었다.
진허 큰스님은 일제 때 해인사 주지를 지낸분으로 80세가 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큰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수도산 정상에서 가야산을 바라보며 큰 고함을 쳤다.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나무아미타불』하고 산을 쩡쩡 울리며 지르는 고함소리는 매우 장엄했다. 평생을 수행한 스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의연한 모습을 대하니 저절로 존경이 우러나왔다.
그러던 어느날 장엄 염불이 딱 그쳤다. 큰스님은 그대로 열반에 드신 것이었다. 스님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선반 위에서 종이쪽지와 과자봉지 하나를 발견했다.
과자가 매우 귀할때라 어쩌다 구해드리면 맛있게 드시곤 했는데 한 봉지가 그대로 남아있어 의아한 생각으로 쪽지를 펴 보았다. 나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나는 가진것 없이 사는것이 중의 본분으로 알고 그렇게 산 까닭에 남길 돈, 땅 한 평 없다. 이제 나를위해 시봉해 주었고 썩은 육체를 정리해줄 삼중 수좌에게 이 과자를 남겼다. 이것을 먹으면서 내 거추장스런 육체를 잘 거두어 달라.』
한 삶의 최후를 제대로 마무리한 진허 스님의 깨끗한 모습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등대가 되고있다.
교도소에서 수인생활을 하면서자신의 최후를 잘 마무리한 사람이 있다.
「황소할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김병호(55)씨는 26년을 교도소에서 지냈다.
7O년 초 대구교도소에서 만난 그는 6·25때 어떤 사건으로 사형수가 되었는데 모범적인 재소생활 덕분으로 사형수 9년4개월만에 극적으로 무기로 감형되었다.
그에게는 유복자가 있었는데 그 아들이 결혼하여 손자를 보게 되었다.
개인교회(교회)에서 처음 그를 만난 후 그가 교회시간 외에는 늘 작업장에서 살다시피 하고 교도소 내에서 수전노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예인들과 함께 위문공연을 가도, 그는 모범수였기 때문에 위문공연 참관자격이 있음에도 나오지 않고 작업장에서 일만 했다. 어느 날 그 이유를 묻는 나에게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내 복역햇수와 나이가 똑같은 아들놈이 결혼해 손자를 낳았어요. 그 손자 놈에게 뭔가 자랑할만한 것이 없어요. 그 손자에게만은 가난을 상속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피땀 흘려 우직히 잘 살라는 뜻에서 황소 한 마리를 사주기로 결심했지요. 그때까지는 나를 위한 시간은 일절 갖지 않기로 했지요.』
이 황소할아버지는 작업장에서 일해 받은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5년 동안 꼬박 모은 결과 송아지 한 마리를 살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 돈을 며느리에게 전하면서 말했다. 『손자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구나. 아이 몫으로 송아지를 사서 키워라. 황소처럼 열심히 일해 이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라고 전해라.』
황소할아버지는 비로소 벅찬 기쁨의 눈물을 마구 흘렸다.
얼마 후 그는 교도소 안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감옥에서도 할아버지·아버지 노릇을 다한 황소할아버지의 모습은 죄인의 모습이 아니라 진실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진허 스님과 황소할아버지는 삶의 마무리를 잘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기억에 화인처럼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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