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서민도 금융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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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외환위기 이후 서민금융의 기능이 크게 위축되면서 서민들의 금융소외 현상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이는 외환위기 이후 소득양극화 현상이 심화하면서 금융양극화 현상도 같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서민금융의 일부를 담당했던 국내 은행들은 외환위기 이후 안전성과 수익성을 우선시해 주택담보대출에 치중하고, 개인재산관리(PB) 등을 내세워 부유층 시장을 전략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담보능력이 부족하고 신용도가 떨어지는 저소득층은 은행차입 자체가 어려울 뿐 아니라 금리 등 차입조건에서 과거보다 더욱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 게다가 전통적 서민금융기관이라 불리는 상호저축은행이나 신용협동기구 등은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기관은 외환위기 이후 경영정상화가 불완전해 자신들의 생존에 급급하다 보니 주택담보대출, 부동산프로젝트파이낸싱 등 수익성 업무에 주로 치중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민경제가 악화하면서 서민의 자금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국내 금융기관들은 이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신용평가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 제도권 금융기관에 접근하기 힘든 개인신용평가 7등급 이하의 저신용자 수는 무려 7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만일 이들 개개인이 최소한 500만원 정도의 자금수요가 있다고 가정하면 국내 전체 서민의 금융수요는 어림잡아 35조원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금들이 제도권 금융기관을 통해 충분히 공급되지 않자 그 틈을 타 불법 사채업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 이에 따라 '살인적인' 고금리와 불법 추심 등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서민금융의 침체는 소득양극화 문제를 악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서민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서민경제가 장기간 위축될 경우 사회적 불안이 야기되고, 국가 경제의 활력이 없어져 궁극적으로 국가 경제성장 기반이 침체될 수 있다. 따라서 창업 등을 통한 소득창출 기회를 확보하고 심각한 금융소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민금융이 조속히 활성화돼야 한다.

그러나 금융에 시장원리가 철저히 적용돼 가고 있고 국가 재정마저 넉넉지 못한 우리 현실에서 획기적인 서민금융시스템 구축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서민들의 금융 수요에 맞는 차별적인 체계가 모색돼야 한다. 먼저 은행권에 손쉽게 접근하기 힘든 중하위권 신용 계층을 위해 전통적 서민금융기관의 역할을 조속히 복원해야 한다. 은행권과는 다른 차별화된 감독정책과 자체의 내부통제제도 강화 등을 통해 실추된 신뢰도를 제고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그동안 지지 부진했던 구조조정을 조속히 마무리시키기 위해 정부 차원의 지원도 필요하다.

불규칙한 소득으로 일시적인 자금 부족 상태에 직면할 수 있는 계층에 대해서는 제도권으로 편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비자금융(대부업)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용자가 용인할 수 있는 적절한 금리 수준에서 어떠한 불이익 없이 손쉽게 대출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특히 금리인하 등 경영환경 악화에도 서민금융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의 소비자 무담보 대금업의 성공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두 가지 서민금융에도 접근하기 어려운 최하위 서민층을 위해서는 밀착 지도와 경영이 요구되는 대안금융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휴면예금뿐만 아니라 사회단체 등 서민복지에 관심을 갖는 다양한 기관, 기업 및 금융기관 등으로부터의 기부금 등을 바탕으로 이들의 자활 능력을 키워줄 필요가 있다.

지금은 선거철이다. 유력 대선주자들은 저마다 서민경제를 살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서민을 위한 일자리 창출뿐만 아니라 서민에 대한 금융지원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대선주자들에게 전해 주고 싶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