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셋이 모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우렁 신랑'들이다. 40대 우렁(43·회사원·결혼 20년차)과 30대 우렁(35·회사원·결혼 5년차), 영계 우렁(32·회사원·결혼 3년차)이다. 모두 맞벌이인 이들은 집안일 이야기가 나오자 '급(急) 친근 모드'로 돌입했다. "열심히 일해도 창의성이 부족하다고 혼난다.""표 안 나고 지저분한일은 내가 다 한다." 푸념도 있었지만 아내 사랑은 같았다. 이들은 "아내의 칭찬 한마디에 힘이 난다""함께 행복한 시간을 늘리기 위해 집안일을 나눠 한다"고 입을 모았다. 우렁 신랑들의 수다를 살짝 엿들었다.
40대 우렁(이하 40대)=세월 참 많이 변했다. 20년 전 결혼할 때만 해도 집안일은 당연히 아내 몫이었다. 맞벌이하는 아내가 "똑같이 일하는데 집안일도 나누자"고 항의해도 그냥 버텼다. 그래서 10년 넘게 그분(아내를 칭함)께 많이 야단맞았다.
30대 우렁(이하 30대)=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집안일을 해버리는 것이 더 편했을 텐데…. 난 아예 처음부터 항복했다.
40대=한번 무릎 꿇으면 계속 해야 하니깐(웃음)…. 집안일을 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들어서다. 어느날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니 내가 쓰레기 봉투 두 개를 들고 서 있더라. 정신 차려 보니 마루에서 걸레질 하고 있고…. 문득 깨달음이 온 건 아니다. 그분께 하도 깨지다 보니 나도 몰래 서서히 바뀐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돈오점수(頓悟漸修.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라는 말을 믿는다.
영계 우렁(이하 영계)=나는 아들 형제의 막내라 결혼 전부터 어머니를 많이 도왔다. 그래서 결혼 뒤에도 자연스럽게 집안일을 하게 됐다. 지금은 내가 가사의 60~70%를 담당한다.
40대=대단하다. 나는 집안일의 20~30%만 겨우 하는데….
영계=우리 집은 내가 집안일을 책임진다. 아내는 나를 도와주는 정도다. 전체적으로 청소.빨래.설거지 등을 내가 계획하고 주도한다. 아내는 옆에서 빨래를 개거나 걸레를 빤다. 장 보는 것도 내 몫이다. 요리는 아내가 더 많이 하지만 내가 할 때도 있다.
30대=그럼 돈 관리는 누가 하나.
영계=돈 관리도 내 몫이다. 공과금 내고 저축도 한다. 내가 하는 일 중 회사 업무가 80%라면 집안일이 20%다. 집안일이 더 즐거울 때도 많다. 회사에선 결재에 수정까지 받아야 하지만 집안일은 기획부터 결재까지 내가 다 하면 되지 않나. 요즘은 금요일날 술도 잘 안 마신다. 토요일 아침부터 밥하고 청소하고, 할 일 많은데 지장받기 싫다.
30대=나는 절반도 못하는데…. 집사람이 여섯 살 아래라서 연애 시절부터 이것저것 도와주고 싶었다. 결혼 뒤에도 아내 일을 도와주는 것이 당연했다. 아내가 밥 차리면 설거지는 내가 하고, 빨래하면 내가 개고…. 내가 집안일의 40% 정도 한다.
영계=집안일을 5년 정도 했으면 나보다 훨씬 낫겠다.
30대=나만의 살림 노하우도 있다. 설거지는 제때 해야 한다. 미루면 더 하기 싫어진다. 섬유 유연제는 세탁 종료 시간이 18분 남았을 때 넣어야 효과가 좋다. 니트 옷을 말릴 때는 팔을 감싸야 늘어지지 않는다 등등….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웃음).
영계=처음엔 실수도 많이 했다. 아내가 아끼는 이탈리아제 스타킹을 깨끗이 빨아준다고 세탁기에 넣고 삶아버렸다. 쪽빛이 우중충한 회색으로 변했다. 아내한테 원망 참 많이 들었다.
40대=나는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깨진다. 카레에 필요한 돼지고기를 사러 갔다. 정육점이 문 닫아서 그냥 돌아왔다. 그분께서 "고기가 없으면 햄이라도 사와야지, 상상력이 없다"며 화를 내시더라. 가사 분담도 그렇다. 그분은 표 나고 창의적인 일을 좋아하신다. 집안일을 계획하거나 요리 같은 것은 그분이 하신다. 그동안 나는 표 안 나고 지저분한 일을 한다. 화장실 치우고 쓰레기 버리고….
30대=다들 깨지는 이유가 비슷하다. 난 "창의력이 없다"고 혼난다. 아내가 항공사 승무원이라 집 비우는 시간이 많다. 그동안 청소며 빨래를 해놓는다. 아내가 돌아오면 내가 한 일을 검사한다. 어떨 땐 "왜 시킨 일만 하느냐, 화장실도 좀 치우지" 하며 핀잔을 준다.
영계=칭찬을 들으면 창의성이 절로 생긴다. 결혼 초 내가 먼저 퇴근해 집안일을 했다. 아내가 집에 돌아와 "고맙다" "사랑한다"며 감동받더라. 안아주기도 하고….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 다음부턴 시키지 않은 일도 찾아서 한다. 아내가 돈 안 쓰고 사람 부리는 법을 깨달은 거지…(일동 웃음).
30대=다른 건 괜찮은데 음식물 쓰레기는 못 버리겠더라. 아내가 생글거리며 쓰레기를 주는데 "못 하겠다"고 반항했다. 다른 승무원 남편들이 그 말을 듣고 "간도 크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감탄하더라. 반면 대학 동창들은 아직 '아저씨' 반, '오빠' 반이다. 집안일을 거드는 친구가 절반 정도인 것 같다.
40대=내 또래엔 가사를 분담하는 친구가 많지 않다. 하지만 그 친구들도 갈수록 압력이 커져 괴롭단다. 내가 충고했다.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고통만 더 커진다"고….
영계=93~94학번부터 분위기가 바뀐 것 같다. 우리가 바로 'X세대' 아닌가. 친구들도 나와 비슷하다. 요즘은 가사 노하우도 교환한다. 친구 하나는 집에서 주로 요리를 한단다. "네가 요리하고 아내한테 설거지 시켜 봐라" 하고 조언하더라. 그런 말에 자극받기도 한다.
30대=아내가 피곤에 절어 퇴근하면 너무 안쓰럽다. 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은 아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한 거다. 집안일을 빨리 끝내 놔야 남는 시간 아내와 영화를 보거나 쉴 수 있다. 내가 집안일을 해야 둘 다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리=홍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