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19. 진짜우유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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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81년 나는 일본 낙농업계를 돌아보러 갔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20~30년 동안 일본은 이른바 '기아시대'에서 탈출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70년대 들어 '포식의 시대'가 열렸다. 이렇게 세상을 바꾼 가장 큰 원동력은 우유의 대량생산이었다. 우유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것은 이른바 'L.L(Long Life)우유'였다. L.L우유는 '변하지 않는 우유'를 의미했다.

나는 외국에 갔을 때 늘 하던 대로 먼저 서점에 들렀다. 여러 종류의 우유 관련 책들 틈에서 '진짜 우유를'이라는 얇은 책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저자는 '乳業저널' 편집장이며 '밀크로드 여행'이라는 책을 쓴 사이토 구니키(齊藤邦樹)였다. '우유에 무슨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하면서도 제목이 주는 이상한 예감에 끌려 책을 구입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몇 쪽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마지막 쪽을 넘길 때까지 나는 앉은 채로 밤을 꼬박 새웠다. 아침에 나는 이 책을 펴낸 출판사로 전화해 저자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바로 전화를 걸어 "나는 한국에서 온 낙농업자로서 당신의 저서인 '진짜 우유를'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책의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든 자신의 저서에 대한 모든 의문을 풀어주겠다"고 대답했다.

"지금 만나고 싶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만날 장소와 찾아오는 길을 자세히 알려줬다. 나는 곧장 택시를 타고 달려갔다. 사이토는 반갑게 나를 맞아줬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메모해 둔 몇 가지 의문을 하나씩 물었다. 사이토의 논리는 명쾌했다. 우유는 목장에서 나온 원유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세균을 죽이기 위해 열처리를 해야 한다. 이때 인체에 해로운 세균만 죽이고 우유의 영양소를 보존하기 위해 섭씨 63도에서 원유를 가공하는 저온살균방식, 즉 파스터라이제이션 방식이 있다. 이와 달리 섭씨 1백30도 이상에서 살균해 우유의 영양소를 파괴하는 초고온멸균방식(UHT)이 있다. 일본의 우유는 대부분 초고온멸균방식으로 처리된다고 했다. L.L우유가 그것이었다. 그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일본은 병든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토는 시인했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병든 일본 사회의 진면목을 정확하게 봤습니다. 진짜 이유는 거기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고 여러 분야에서 일본의 경우를 전범(典範)으로 여기고 뒤따라오는 한국.대만 등 상당수 아시아 국가의 공통된 병리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비자는 바보인가."

"바보라기보다는 공범입니다."

사이토의 말에 따르면 소비자도 '우유의 진실'을 알면서도 값싸고 오랫동안 두고 마실 수 있는 우유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사이토의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내 목장에서 생산하는 우유만큼은 '진짜우유' 상태로 소비자에게 공급하겠다"고 결심했었다. 나의 구상을 사이토에게 밝히고 "여러가지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던 그는 나의 결심이 확고함을 알고는 다짐을 했다.

"이미 짐작하신 대로 이것은 단순한 우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회의 병든 양심과 왜곡된 관행에 대한 문화적 도전입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려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돕겠습니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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