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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자만'이 경제 죽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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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5년만 더 참자던 일본경제의 태양은 다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구조조정이 형식에 그치고, 착시(錯視)와 자만, 위기 불감증 속에 성장동력이 식어가는 근원적 위기로 치닫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과 한.유럽연합(EU) FTA 협상 개시로 당장 살판이라도 난 듯한 착각을 안기지만 위기의 경고음은 그치지 않는다. FTA는 우리 경제에 천국도 지옥도 아니다. 한국경제에 직언을 잘하는 경영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는 "한.미 FTA 타결의 자축은 딱 2주만 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충고했었다. 세계 최대 규모인 북미자유무역협정이 13년이 지나도록 별 효과를 못 내고 있는 데 반해 일본은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아도 일본 차가 미국시장의 30%를 점하고 있음을 그는 상기시켰다. 무역문제는 'FTA의 정치'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능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말한 현실이었다.

두 달 전 이건희 삼성 회장이 "삼성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4, 5년 뒤 아주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경고를 발했을 때 우리 당국은 그 내용에 주목하기보다 이를 크게 보도한 언론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었다. 삼성전자의 경우 매출은 계속 늘지만 이익은 2004년 이후 줄곧 줄어들고 있다. 마땅한 신사업을 못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한국이 끼여 있다는 샌드위치론은 10년 전에도 되풀이되던 푸념이었다. 무엇보다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 것은 얼마 전 노무라종합연구소의 오노 히사시 서울지점장이 경고한 한국경제의 4대 장벽론이다. 그의 경고는 FTA 축제 무드에 가려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노무라연구소는 1997년 한국경제보고서를 통해 국가부도라는 불길한 사태를 예측한 족집게였다.

4대 장벽의 첫째가 기술장벽이다. 원천기술이 없어 미국과 일본의 기술력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중국의 가격경쟁력에 추격을 당하고 있다. 둘째가 이익장벽이다. 단일품목의 시장 지배력이 높아도 이익이 줄어든다. 대만 중견업체들의 이익률이 더 높다. 셋째가 시장지배장벽이다. 막대한 투자로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중국의 대규모 설비투자와 국가자본동원력을 감당할 수 없다. 넷째가 첨단산업장벽이다. 정보기술(IT)과 소프트웨어 서비스산업의 축적된 지적자산이나 브랜드력이 부족해 하청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업종을 막론하고 핵심 부품은 일본에 의존한다. 세계시장 점유율이 60% 이상인 핵심 부품 전문업체가 일본에 수백을 헤아리고 이들이 일본 제조업의 르네상스를 뒤받치고 있다.

이런 경제.산업의 어두운 현실보다 우리를 더 절망케 하는 것은 현 집권층과 정치권이 낙관론에 빠져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FTA가 제대로 효과를 내려면 교역증대보다 투자가 활성화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규제 완화와 균형발전 전략 재검토, 시장 메커니즘 복원 등 경제 자율화와 과감한 개방이 선행되어야 한다.

균형된 복지와 평등분배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자본을 파괴하고 일자리 창출을 막아 평등 달성은커녕 서민층을 실업자로 내몬다. 정부 주도형 성장모델을 대신할 새 성장모델이 절박한데도 한계기업들의 출구인 개성공단이 무슨 한국경제의 돌파구라도 되듯 남북관계 개선 속도 내기에 바쁘다.

집값은 잡아야 하지만 퇴로를 차단하고 시장 자체를 압살하는 것은 정책이 아니다. 소득 하위 20% 계층이 빚을 내 생계를 유지하고, 학자금대출 연체 잔액이 1년 새 5배로 늘었다고 한다.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되고 부모의 상환능력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경제가 원칙대로 가고 있다'며 정치권에 리더십 훈수로 여유를 부리는 상황이다. 자기들만이 평화개혁세력이고, 평등주의 복지국가의 낡은 모델에 집착하며 성장도 복지도 분배도 평등도 함께 이룰 수 있다는 독선과 아집, 이것이야말로 경제를 죽이는 하이에크의 치명적 자만(fatal conceit)이 아니고 무엇이랴.

변상근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