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부가 쓰는 물건이라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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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31면

산다는 건 되풀이되는 일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노력이다. 어제 했던 일을 오늘 반복하고 내일 또한 마찬가지다. 먹은 그릇의 설거지는 다음 끼니를 위한 준비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 - 日 신와 (SHINWA)사 철자

일상의 마무리는 끝이 아니다. 먹지 않으면 설거지도 필요 없다. 지루한 반복을 피할 유일한 묘책은 죽음을 선택하는 용기다.

온갖 물품을 사들이는 이유란 반복을 겸허히 받아들이려는 표시가 아닐까. 되풀이의 숙명을 좀 더 촘촘하게 메워주기 위해 온갖 물건은 세분화된다. 짧은 것과 긴 것, 큰 것과 작은 것의 사이엔 무수히 많은 선택이 있다. 인생을 대충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물건 또한 끝없이 진화한다.

학창 시절 이후 별로 쓸 일이 없던 자가 필요해졌다. 30㎝ 가지곤 모자란다. 생활의 단위는 이제 미터 크기로 커져버린 탓이다.

새로 들여놓을 냉장고와 텔레비전을 놓을 공간의 사이즈를 재야 한다. 가만히 앉아 물건을 보내기 위한 택배 포장 박스도 만들어야 한다. 필요한 오디오 케이블의 길이를 맞추기 위해서도 긴 자가 필요하다. 크기의 확대는 곧 생활의 규모를 의미한다.

물건은 꼭 필요할 땐 정작 없다. 공구 통을 뒤집어 보아도 서랍을 몇 번이나 뒤져도 그 흔한 자는 나오지 않는다.

분명히 잘 챙겨 놓았을 줄자는 어딘가 처박혀 있을 것이다. 아끼다 똥이 되기 쉽다.
당장 써 먹을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물건도 무용지물이다. 물건은 써 먹을 수 있을 때 존재의 의미를 더한다. 없어서가 아니라 찾지 못해 물건을 사들이는 우리들이다.
나의 사부가 쓰는 철제 자를 떠올렸다. 스테인리스 재질로 만든 단단하고 야무진 느낌의 일본 신와(SHINWA)사 제품.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아는 사람끼리만 돌려쓰던 이 자는 수입되어 팔리고 있다. 적어도 600㎜ 이상 되어야 한다. 거금(?) 2만원을 선뜻 주고 산 이유는 분명하다. 사부가 쓰는 물건이라면 틀림없을 것이란 믿음이다.

1㎜ 두께의 철판으로 만든 신와 철자의 생명은 정확한 눈금이다. 일본 공업규격인 ‘JIS’의 오차 범위보다 더욱 정밀하다. 표시가 지워지지 않도록 각인시켜 파 놓은 눈금, 사용 시 금속광택의 거슬림을 막기 위해 무광처리를 해 놓은 섬세한 배려를 읽을 수 있다. 뒷면엔 인치와 미터 단위의 환산표와 필요한 규격표를 더해 놓았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자 하나에는 큰 배려가 담겨 있다. 실제 사용해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작은 부분들이다.

신와 철자는 생산자의 편의 대신 사용자 입장의 배려를 우선한다. 자의 끝엔 구멍이 뚫려 있다. 고리를 걸어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놓고 쓰라는 친절함이다. 칠칠맞지 못하게 흘리고 다니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필요한 기능 덕분에 자의 쓰임은 높아지고 있다.
오차는 적을수록 정교해진다. 생활 또한 오차를 줄이려는 노력만큼 섬세하게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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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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