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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송의 드로잉 에세이-벌레와 목수 <8>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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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18면

메뚜기 널 잡겠다, 단풍나무·물푸레나무 

벌레가 작고 보잘것없는 미물이라고? 천만에. 조선시대에 벌레는 시대의 향도였다. 벌레가 솔잎을 먹으면 사람들은 자숙해야 했다. 술을 먹거나 잔치를 열어서도 안 됐다. 태종 때 벼가 잘 여물지 못하고, 벌레가 솔잎을 먹고, 시전(市廛)에 불이 나자 사헌부가 왕에게 술을 금하자고 청한다. 그래서 왕은 공사를 막론하고 모든 잔치를 열지 못하게 한 일도 있었다.

벌레를 죽이고 살리던 왕

벌레를 다스리는 일에 소홀한 관리에게는 죄를 엄히 물었다. 선조 때 좌승지 이선복이 아뢰기를 “사직단 밖 남·서·북 3면의 허다한 소나무의 잎을 송충이가 갉아먹어 보기에 매우 놀라운데, 본서의 관원은 시종 제조(提調)에게 말하지 않아 단수(壇樹)를 거의 말라 죽게 했으니 그런 자들에게 위촉할 수 없습니다. 장무 관원을 먼저 추고하여 치죄하고, 벌레 잡는 일은 해당 관원이 전혀 마음을 써서 거행하지 않으니, 한성부 낭청으로 하여금 방민(坊民)을 많이 거느리고서 본서의 관원과 함께 기어이 다 잡아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선조 25집 342면) 하니, 왕이 윤허한다고 했다. 벌레 잡는 일을 소홀히 하면 그 파장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벌레를 잡아 없애는 일은 관리들의 주요 업무이기도 했다. 자고로 관리들이란 제 품 들여 일하기보다 백성들을 부리는 것에 능한 자들이다. 백성들은 농사짓는 틈틈이 벌레를 잡는 일에 동원되어야 했으므로 이제나 그제나 일손 바쁜 사람들이 원망이 없을 수 없었다. 벌레들은 벌레들과 다를 바 없는 백성들 손에 잡혔으며 대개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벌레 죽이기-영조의 경우

백성의 우두머리이자 나라의 통수권자인 왕은 백성의 원망을 다스리고, 더불어 벌레들의 처지도 살펴야 하는 자리였다. 왕들은, 특히 스스로 어진 왕이 되기를 자처하는 임금일수록 벌레를 죽이는 일에 신중했다. 영조는 가뭄이 들고 벌레가 곡식을 먹는 걸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벼 알 하나하나가 모두 신고(辛苦)한 곡식인데, (벌레들이) 이삭을 먹고 줄기를 먹었으니 장차 남음이 없을 것이다. 아! 나의 부덕으로 인하였으니 곡식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해충이 그치게 되면 남는 것은 희망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혹독함이 가뭄보다 심하다. 아! 이 벌레는 어찌하여 내 살을 빨아먹지 않고 백성의 곡식을 먹는가?”(영조 44집 295면)

왕의 살과 피가 벌레의 자손을 번창시키는 데 특별한 효험이 있었을까. 어쨌든 훌륭한 왕이다. 벌레가 곡식을 먹는 것은 자연의 현상이기보다 왕의 부덕의 소치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참된 왕의 자세였다. 그렇다고 벌레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었다는 말은 아니다. 훌륭한 왕은 백성의 어버이일 뿐이다. 벌레의 임금은 아니다.

왕은 벌레를 죽이고 처리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최종 결정권자였다. 왕이 한갓 벌레를 죽이는 방법을?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땐 그랬다. 왕은 벌레를 어떻게 죽여야 할지 고민했을 뿐 아니라 이 문제로 신하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벌레를 어떻게 죽일까 하는 문제가 그만큼 중요한 국사였던 까닭이다.

이런 질문은 정말 하기 싫지만, 벌레를 어떻게 죽여야 할까? 잡아서 모은 벌레를 태우거나, 땅을 파고 묻거나, 물에 던지면 간단히 끝나는 일이 아니던가? 그렇지 않았던가 보다. 어진 왕 영조는 벌레들에게 참으로 큰 자비를 베풀었으니 잡은 벌레를 불에 태워 죽이지 말라고 이른다. 왕은 유교의 가르침과 물리적 이익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한 끝에 그렇게 결정한다.

“먹는 것은 진실로 임금의 부덕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저것이 비록 미물이라 하더라도 나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한번 호령하였다 하여 불에 태운다면 이는 사람에게 살인하기를 권하고, 또 법으로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잡은 벌레를 구덩이를 파서 묻고 불에 태우지 말게 하라.”(영조 44집 295면)

구덩이에 묻어 죽이되 불에 태우지 않는 게 벌레에게는 도대체 뭐가 달라지는지 알 수 없지만, 영조는 차마 불에 태워 죽이는 끔찍함을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인간들이 벌레의 사정을 봐주는 것은 언제나 거기까지였다.

벌레 죽이기-정조의 경우

영조를 이은 정조 역시 잡은 벌레를 어떻게 죽일 것인가로 고심했다. 대개 벌레를 잡으면 구덩이에 넣고 태워 묻는 일이 편하기도 했을 것이며 신하들의 생각도 대강 그랬던 것 같다. 생각하면 골치 아프니 시시콜콜 따질 일이 아니기도 했을 것이다. 이는 고전과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는 일이니 왕이 벌레를 태워 죽이라고 결정한들 누가 뭐라 할 것도 아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벼메뚜기 제거하고 못된 벌레 불살라주오[去其螟<87A3>秉卑炎火] 하였고, 당 태종(唐太宗) 같은 이는 황충(蝗蟲)을 삼킨 일까지 있었으며, 그 후 요숭(姚崇)이 재상이 되었을 때에는 황충을 주워내 혹 불태우기도 하고 땅에 묻기도 하여 그 해를 제거하였으므로, 후인들이 또한 그 사업을 칭송하고 있다.” (정조 47집 81면) 하였으니 말이다.

물론 이런 고전의 가르침을 정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잡은 벌레를 불사르거나 구덩이에 넣기보다 물에 던져 버리는 쪽을 택했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에 아직도 스스로 편치 못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벌레들이 벌이나 누에와 같은 공이 없는 데다 해독은 모기나 등에보다 더 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꿈틀거리는 생물이니, 성인이 벌레에 대해 그 공도 기록하고 그 해독도 명시한 뜻을 따라 마땅히 잡아 제거해야 할 것이나, 여기에도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의당 생물 살리는 덕을 병행하도록 해야 하니 해독이 되는 것도 그 종류에 따라 각각 크고 작은 다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몰아서 늪으로 내친 것은 또한 불 질러 태워 버린 것보다는 나은 것이다. 그리하면 생물을 살리는 덕도 그 속에 있는 것 아닌가.”(정조 행장 47집 83 면, 312면)

살리다니? 늪에 빠뜨리면 벌레가 살 수 있다고 누가 그랬던가? 장구벌레나 소금쟁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꿈틀거리는 벌레가 물에서 살 수 있다는 말일까? 정조는 정말 벌레를 물에 빠뜨리면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을까?

그랬다. 정조가 벌레를 물에 넣어 버리라고 결정한 건 이유가 있었다. 그는 신하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벌레가 날아 바다로 들어가 물고기와 새우로 변하니 옛날 복파(伏波)라는 사람이 무릉(武陵)을 다스릴 때의 생생한 증험이 아직도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한 바 있다.

저런! 복파가 누군지는 몰라도 거짓말쟁이임에는 틀림없다. 아니면 무식하거나! 아무튼 정조는 벌레들을 죽이기보다 환생을 유도하는 쪽이 더 낫다 싶었을 것이다. 정조는 벌레를 물에 빠뜨림으로써 어질고 착한 왕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속마음이야 어찌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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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김씨’ 김진송씨는 『현대성의 형성-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를 쓴 근대 연구자,『기억을 잃어버린 도시』의 소설가,『이쾌대』의 미술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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