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옷감 귀해 담요로 선수복|48년 런던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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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근대올림픽이 부활된지 올해로 96년. 한국은 일제시대부터 올림픽 참가와 관련, 우리 민족사에 영욕의 발자취를 남겼다. 건국 후 최초로 태극기를 휘날리며 참가한 48년 런던대회 이후 88년 서울대회를 우리 손으로 주최하기까지 올림픽은 국력 신장과 비례해 향수·추억이 서려있는 대축제였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50일 앞두고 한국의 올림픽 출전사를 에피소드별로 엮어본다. 【편집자주】
한국이 태극기를 앞세워 첫 출전한 올림픽은 1948년 제14회 런던대회. 46년 올림픽 개최가 2차 대전 최대 피해지인 런던으로 결정됐으나 한국은 사회가 혼란한 때여서 올림픽 참가 여부를 쉽게 결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조국의 광복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올림픽에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이에 따라 46년7월 재건된 조선체육회 안에 올림픽대책위원회가 설치돼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시급한 것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47년 정식회원이 됐다.
당시 올림픽 출전에 대한 국민들의 열기가 대단해 초대국회는 선수단에 격려 메시지를 채택할 정도였으나 체육시설 등 여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체육시설이라야 고작 서울운동장이 전부였고 실내체육관은 YMCA·한국체육관이 유일했으며 훈련비조차 넉넉지 못했다.
선수들은 약 한달간 강화훈련을 받았으나 출전비 또한 큰 문제였다.
대회출전에 앞서 47년 조직된 올림픽후원회는 국민 성금을 마련하자는 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당시 민정장관이던 안재홍씨를 후원회장으로 선출했다.
휘문고 교사로 런던올림픽에 역도선수로 출전한 김성집(73) 태릉선수촌장의 회고담.
『후원회가 주도가 돼 복권을 팔기로 했지요. 당시는 국민들이 올림픽을 통해 민족의 자존심을 찾으려는 듯 열기가 대단했어요. 순식간에 1백원까리 1백여만장이 팔려 그 수익금으로 8만여달러를 마련, 올림픽 출전 비용을 거의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올림픽 후원권은 우리나라 복권의 효시인 셈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에 태극기를 가슴에 단 69명의 선수단을 당당히 파견할 수 있었다.
선수52명 중 31명이 30세가 넘는「고령자」들이었다. 어느 종목은 39세의 선수도 있었다.
선수단복은 그 나라의 문화·경제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으로 해방 후 우리나라의 물자사정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단복에 얽힌 에피소드 한 토막.
단복은 감색 상의·회색바지를 한 벌씩 마련했는데 옷감은 담요로 만들었다.
한여름 복더위에 담요복장을 하고「점잔」을 뺀 선수들은 땀을 줄줄 흘렸다. 땀에 밴 복장은 잘못들인 옷감의 물감이 빠지면서 몸에 붉은 색이 배어 나오기도 하는 등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선수단은 6월21일 출정의 날 YMCA에 모여 도보행진으로 종로·남대문을 거쳐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은 선수단을 보내려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거국적인 축제 분위기였다.
열차편·배편으로 일본에 도착한 선수단은 전쟁책임을 물어 올림픽 출전을 금지 당한 일본인들의 부러움 속에 노르웨이 국적 4발 프로펠러기로 방콕·캘커타·봄베이·카이로·로마·암스테르담을 거쳐 20일만에 런던에 도착했다. 요즘 같으면 한나절도 채 안 되는 길을-.
런던에 도착한 한국선수단은 하이드파크 공원에서 청춘 남녀들이 껴안고 입을 맞추는 광경을 처음으로 목격하고『해괴하고 끔찍한 짓』이라며 질색하기도 했다.
해프닝은 속출했다.
폐막식을 이틀 앞두고 복싱에 출전한 한수안씨는 오후5시로 예정된 경기를 잘못 알고 잠자다 오후8시에 경기장에 부랴부랴 도착했으나 가까스로 실격을 면한 채 메달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혼란기에 우여곡절 끝에 처음 출전한 한국은 역도의 김성집, 복싱의 한수안이 동메달을 차지해 참가 59개국 중 24위에 오르며 아시아에서는 인도에 이어 2위라는 개가를 올렸다. <방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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