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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자탐구 식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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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상황 바뀌면 눈딱감고 한말 뒤집어 YS/말 바꿀 경우 대비해서 언제나 “여운” DJ/유리하면 시인 불리하면 아예 무시 CY/대표적 사례/합당전엔 “목숨걸고 대 6공투쟁” 김영삼후보/87년 「불출마」선언후 평민후보로 김대중후보/“총선때 현대지원 받은건 헬기뿐” 정주영후보
말은 곧 사람의 생각과 됨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다. 특히 고위정치인의 말은 그의 정직성과 신뢰도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김영삼민자·김대중민주·정주영국민당 대통령후보가 지나온 세월 남긴 말의 궤적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탐구다. 결론은 3자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적지 않은 식언을 다반사로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지도자가 말에 책임을 지지않고 국민은 거짓말을 끝까지 추궁하지 않는 우리사회의 병폐를 한눈으로 볼 수 있다. 식언을 거둬들이는 지도자들의 기교에 국민들이 너무 관대한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만도 하다.
김영삼후보는 행동의 정치인이다. 그는 특유의 낙천적 성격과 결단력 탓인지 과거 발언내용을 상황이 바뀌면 미련없이 버리고 잊어버리는 예가 적지 않았다. 그는 형식논리에 덜 얽매이는 편이며 필요에 따라 눈 딱감고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 이미 한 말을 뒤집는 장기(?)를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김대중후보는 논리의 정치인이다. 그는 중요한 발언을 할 때면 상황변화를 상정,말을 바꾸어야할 경우에 대비해 늘 후퇴할 자락을 깔아둔다. 때문에 그는 자기말의 번복을 나름의 논리로 합리화 하려 든다. 이따금 그의 주장에 「궤변」이란 비판이 따르는 것은 바로 이 논리성 때문이다.
정주영후보는 근본적으로 기업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언제 그랬느냐는듯 식언자체를 무시하는 자세를 취하는 일이 잦다. 집요한 추궁이 덜한 한국사회에서 눈앞의 이득을 쫓는 기법으로 말을 사용하는 느낌을 왕왕 준다.
두김씨의 대표적 식언사례는 87년 대통령후보 단일화 실패다. 김영삼씨는 『마음을 비웠다』,김대중씨는 『직선제 개헌이 되면 불출마하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모두 거짓말이었다. 김영삼씨는 정치규제에 묶여있던 85년 3월7일 어느 일간지와의 회견에서 『83년 단식투쟁을 통해 대통령을 하겠다는 욕심을 완전히 버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공개적으로는 『마음을 비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는 87년 10월10일 대통령출마를 선언한뒤 관훈토론회에서 『마음을 비웠다고 하는 말은 정말 이 국민에게 봉사하겠다는 말』이며 『비록 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하더라도 욕심을 절대 안낸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비운 마음의 실체를 국민에 대한 봉사결심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김대중씨는 86년 1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전두환정권이 수락한다면 비록 사면·복권이 되더라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김영삼씨와 결별,87년 평민당을 창당한뒤 관훈토론회에서 『불출마선언은 전두환씨가 직선제 제의를 즉각 수락하고 건국대사태관련 학생들을 용공으로 몰아 탄압하는 것을 중지하면 내가 안나갈 수 있다고 한 것이며 상대방이 즉각 이를 거절했으므로 내가 약속을 어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해명논리를 폈다.
논리상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국민의 뇌리에는 불출마공식선언이 워낙 부각돼 있어 식언의 의심을 받았다.
불과 5개월여 짧은 정치활동을 하면서 정주영씨는 양김씨 못지않게 식언,또는 앞뒤가 안맞는 말을 했다.
정 후보는 4월9일 관훈토론회에서 『국세청의 현대상선 탈세발표는 90%가 근거없는 허위』라고 주장했지만 검찰 수사결과 아들 몽헌씨 등 6명이 구속됐다. 또 정 후보는 지난해 11월 국세청의 세금추징에 대해 『돈이 없어 세금을 낼 수 없다』고 했다가 곧 번복했고 국민당창당 전후 『정치를 한다』『안한다』 몇번 오락가락하면서 말을 던져놓고 유리하면 시인하고 불리하면 부인하는 수법을 되풀이했다.
정 후보는 특히 창당 및 총선기간 한번에 5억∼1백억원씩 역대 정권에 바친 정치자금액수(1월8일),광양만 매립공사수주때 모정치인에게 거액제공(3월11일) 등 폭로를 많이 했다.
그러나 4월18일 경실련과의 토론회에서 『관에 의존해 큰돈을 번 적이 없으며 내 재산은 모두 신용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등 왜 정치자금과 뇌물을 바쳐야 했는지에 대해선 입을 다물거나 엉뚱한 이유를 댔다.
더욱이 지난달 12일 기자간담회에서는 『정부가 재벌을 만들었다. 재벌은 더이상 경제발전에 공헌하지 못한다』고 재벌해체론을 제기했으나 현대부터 재벌을 해체할 용의가 없으냐는 질문에는 묵묵부답,깔아뭉갰다.
87년 12월16일 대선패배후 두김씨가 보인 반응과 행로도 말의 책임,또는 일관성과는 거리가 멀다.
김영삼씨는 패배가 확정된 17일 오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민 주권을 도둑질한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정권과는 같이 일할 수 없으며 생명을 바쳐서라도 투쟁할 것』이라고 정권타도투쟁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제2야당의 설움(?)을 겪은지 2년만에 1백80도 바뀌어 노태우대통령과 3당통합을 하면서(90년 1월) 『나라의 장래를 위해 숭고한 입장에서 결정했다』는 「구국의 결단」을 앞세웠다.
그는 같은해 10월 3당 합당당시의 약속인 내각제 합의각서가 언론에 보도됐을때 처음엔 『그런 것 없었다』고 잡아뗐다가 물증이 나오자 『무리한 개헌시도는 엄청난 국민적 저항과 국가적 혼란만을 야기한다』며 각서공개 자체를 공작정치로 몰아세우면서 내각제를 포기토록 역공을 시도,판을 뒤흔들어 버렸다.
이같은 약속 번복 때문에 여권내에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란 강한 비난을 받았고,또 지난 2년간 내부의 피나는 권력투쟁을 야기했다.
김대중후보는 13대 대선패배후 『컴퓨터 개표집계의 조작에 의한 부정선거』라고 줄기차게 규탄해 한동안 실소를 자아냈다.
이같은 그의 주장은 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라는 국민적 염원을 박차고 4자필승론으로 대선에 참여,정권교체에 실패한데 따른 여론의 세찬 비난을 묽게 하려는 계산된 발언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김대중후보는 88년 노태우대통령의 선거공약인 중간평가를 실시하라고 촉구했지만 89년 3월14일 중앙일보와의 회견에서 『나는 무턱대고 강경하지 않다』면서 중간평가의 신임 연계를 반대해 중간평가를 유야무야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김 후보의 이같은 태도변화는 중간평가에서 노 대통령이 높은 지지를 받게 되면 오히려 야당에 불리해지지 않을까 해서 취해진 전술적 식언으로 받아들여졌다.
김대중씨는 80년대 초반 미국망명시절 대통령직선제에 회의를 표시하는 말과 글을 남겼었다. 두 김씨가 직선제개헌을 주장하던 85년 11월당시 민정당은 『직선제가 바로 민주주의는 아니며 많은 중남미 국가들이 직선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독재국가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다』는 김대중씨의 소책자를 공개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김 후보측은 『11대의 상황에선 야당이 약해 자칫 직선제개헌이 집권당의 영구집권논리에 이용될 우려가 컸기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찜짐한 뒷맛을 남겼다.
김영삼후보는 지난 총선기간 무소속후보 강세지역에 유세차 들르기만 하면 『무소속당선자는 한명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김 후보는 지금 무소속후보의 영입에 앞장서고 무소속의원 입당환영식에선 한술 더 떠 『어려운 시기에 결단을 내려줘 고맙다』고 말해 앞뒤가 맞지 않음을 보여줬다.
정 후보는 14대 총선직후 기자간담회(3월25일)에서 『총선기간중 현대로부터 지원받은 것은 헬기를 빌려 탄 것밖에 없다』고 현대와 거리를 두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총선기간중 현대그룹내 「제도개선위원회」「종합기획실」 등을 통해 당원 2백여만명 급조,유세장 인력동원 등 총력지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현대맨」들이 각 지구당에 배치돼 자금관리·지역구 현황분석 등 업무를 담당하다 총선뒤 원대복귀한 것은 공지의 사실이나 다름없다.
그는 또 지난 1월20일 현대 사장단회의에 불쑥 참가해 『계열사 사장들이 국민당에 입당하는 등 나의 정치활동을 도와달라』고 요청해 놓고서도 기회있을 때마다 현대와의 단절을 주장해 왔다.<신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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