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끝)목공예 손덕균씨|나무깍기 입신경지 올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목공예가 손덕균씨(39·경인목공예대표)의 솜씨는 반도체기술자만큼이나 정교하다. 하찮은 나무 한 토막이 그의 손에서 0.3㎜의 두께로 깎여 나올 때 그것은 이미 나무라기보다 하나의 신소재다.
손씨가 즐겨 만드는 패물함 표면에 상감된「나무 신소재」는 서로 교차하고 때로는 원을 그리며 기하학적 무늬를 연출한다. 제 아무리 정밀한 기계라도 흉내낼 수 없는 일을 그는 해내고 있는 것이다.
불혹에도 채 이르지 않은 손씨가 신기의 나무 깎기를 구사하게 되기까지는 뼈를 깎는 외길 정진이 있었다. 지난 65년 배고픔을 참지 못해 고향 이천을 떠나 상경한 12세의 소년이 처음취직한 곳은 행당동에 있는 효성 공예사였다.
『키가 작아 작업대에 턱을 걸친 상태에서 대패질을 하고 정을 쳐댔습니다. 그러나 재미도 있고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힘든 줄 몰랐어요.』 효성공예사의주인이자 그의 스승인 고 김명남씨는 이런 손씨를 보고「장이」로서의 자질과 열성을 인정, 66년 방한한 존슨 대통령에게 선물할 테이블 제작을 맡겼고 손씨는 스승의 배려에 보답하듯 번듯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비슷한 또래에 대한 부러움이 사라지고 목공예를 천직으로 삼아야겠다는 결심이 선 것도 이때쯤이었다. 『작품이 혼과 정성의 결정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지요.』 혼과 정성은 결코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다는 장인의 철학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었다. 손씨는 지금까지 수백 점의 작품을 만들었지만 지난 83년 L백화점에서 전시한 물품 중 벼루함 등 4점을 「너무 친절히 대하며 접근했던」장충동의 「이씨 사모님」이라는 사람에게 깜빡 4백여 만원에 판 것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돈을 받고 작품을 내준 일이 없다. 먹고살기 위해 손씨는 작품 아닌 상품도 물론 만든다. 장식용 소품류를 중심으로 일본에 십만달러 어치의 물건을 수출한 실적도 있다. 그러나 최근 일본 중개업체의 부도로 수출선을 미국으로 돌려야할 처지에 있다.
나름대로의 불황을 손씨는 새 기법 개발 등으로 이겨낼 것이라고 자신한다. 소뿔·돌·흑단 등을 상감의 재료로 목공예분야에 최초로 도입하고 자수와 목공예의 접합을 시도했던 그였기에 작품을 통한 시도는 상품에 응용돼 활로를 여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믿고있다. 이런 그의 시도 중 일부는 이미 전국기능대회·동아미술제·민예품경진대회 등에서 신선함과 우수성을 인정받고 많은 관련업체에 의해 실용화됐다.
「돈이 될 수 없는」작품에만 매달려온 까닭에 재작년에 겨우 20평 남짓한 아파트를 마련한 그는 『그러나 부단히 걸어온 목공예 인생에 한없는 자부심을 느끼고있다』고 말했다. <김창엽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