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실천하는 정치/정규웅(중앙칼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각 정당이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대통령선거에 나설 후보들을 결정했다. 경천동지할만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한 이들 가운데서 차기대통령이 나오도록 되어있다.
예상했던대로라고 덤덤해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결국 그렇게 되는 것을 공연히 시끄럽게한 까닭이 무엇이냐고 시큰둥해 하는 사람들도 있고,모두 대통령 될만한 분들이 나섰으니까 누가 당선돼도 뭔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느냐고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있다.
○우선 되고보자 속성
국민의 정치참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덤덤해 하거나 시큰둥해 하는 쪽보다는 그래도 기대를 갖는 쪽이 올바르고 바람직한 태도다. 앞의 두 부류가 소극적이고 냉소적인 입장이라면 뒤의 한 부류는 적극적이며 낙관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극적이며 낙관적이라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정치나 정치인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역대 어느 정권도 국민들에게 신뢰를 심어주지 못해온 탓이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여러가지 다채로운 정책과 공약과 비전이 제시되곤 했으나 대부분이 말 그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 정부에 기대를 갖는다해도 그것은 단지 「새로움」에 대한 막연한 기대일뿐 어떤 대통령이 어떤 정치를 펼것인가 따위에 대한 구체적 기대라고 보기는 어렵다. 새 정부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각 후보자들이 앞으로 자신이 펼쳐나갈 정치의 모양새를 각기 그럴듯한 형용사로 표현했을 때도 국민들은 별로 공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실천가능성 회의적
일찌감치 후보로 선출돼 여당과 제1야당의 후보선출 과정을 느긋하게 관망한 한 야당 후보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깨끗한 정치」라고 말했다. 뒤이어 집권당의 후보는 「큰 정치」를 구현하겠다고 선언했고,그와의 경선을 중도에서 포기한 후보는 「새정치」를 표방한 정치모임을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제1야당의 후보는 경선전 「포용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공표하더니 후보로 선출되고 나서는 「부드러운 정치」를 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해도 말 그대로 실현되기만 한다면 이제 우리나라 정치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새 면모를 갖추도록 돼있다. 새 대통령을 뽑을 권리가 있는 국민들도 선택의 폭은 훨씬 좁아진 셈이다. 「큰 정치」를 기대하는 사람은 그쪽에 표를 던지면 될 것이고,「부드러운 정치」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내세운 후보를 지지하면 될테니까.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말 그대로 새모습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을까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이다. 지금까지의 우리네 정치행태가 불신의 바탕을 이루고 있지만 비단 그뿐만은 아니다. 한 지식인은 말한다.
『지금까지 깨끗하지 못했던 사람이 말로만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 해서 정치가 갑자기 깨끗해질수 있겠는가. 큰 정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여태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아직 대통령이 되지 못했기 때문인가. 부드럽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당장 부드러워지는가.』
행동보다 항상 말이 앞서는 우리네 정치의 속성과 그 풍토가 문제다. 자신이 내뱉은 말의 실천가능성 여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선 해놓고 보자는 것이 일종의 관행처럼 되어있다.
최소한 국민을 속이겠다는 생각을 갖지는 않았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국민을 속인 꼴이 된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아왔다.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 해도 속인 것은 속인 것이다.
○국민 끝까진 못속여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국민의 일부를 끝까지 속일 수는 있다. 국민의 전부를 한동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의 전부를 끝까지 속일 수는 없다.』
아무리 다채로운 정책과 비전을 제시한다 해도,아무리 그럴듯하고 멋진 표현들을 동원한다해도 국민들에게 정작 신뢰를 주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모든 국민이 끝까지 속아주지는 않을 것이다.<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