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비운 공중보건의, 알고 보니 ‘무단 알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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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02면

지난해 10월 초 전남 여수시 남면의 한 보건지소. 치통에 시달리던 김분순(가명ㆍ68) 할머니는 집에서 3km 떨어진 보건지소를 찾았다. 하지만 치과 담당 공중보건의(이하 공보의) A씨는 없었다. 김 할머니는 진통제 처방만 받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음날 김 할머니는 다시 보건지소를 찾았으나 A씨는 여전히 자리를 비웠다. 직원은 “A씨가 출장 진료 중”이라고 했다. 결국 김 할머니는 배를 타고 1시간50분이나 걸려 여수시내에 나가 병원 진료를 받았다. 출장 진료를 갔다던 A씨는 보건지소를 무단 이탈해 여수 시내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감사원 특별조사본부는 지난 2월부터 경기도ㆍ전남북ㆍ경남의 도서(島嶼)지역 공보의 근무실태 암행감찰에 나서 대상자 91명 중 65명이 무단 이탈한 사실을 적발해 6일 보건복지부에 통보했다. 이 가운데 8일 이상 무단 이탈한 47명은 공보의 자격이 박탈되고 공익요원으로 재입대해야 한다.

적발된 공보의는 옹진군 18명, 용인시 2명, 여수시 28명, 영광군 3명, 군산시 6명, 통영시 8명 등이다. 특히 여수 한 보건지소에 근무하는 공보의의 경우 지난해 5월부터 올 2월까지 21회에 걸쳐 무려 171일이나 자리를 비웠다. 같은 보건지소에 근무하는 또 다른 세 명의 공보의도 각각 104일, 84일, 78일 동안 ‘장기출장’ 중이었다. 이들 공보의는 근무교대를 통해 한두 명만 자리를 지키고 나머지는 시내 병원에서 야간당직이나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공중보건의 아르바이트’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일부는 자택이나 친지 집에서 시험공부를 했다.

공보의가 근무지를 이탈하는 것은 보건당국의 허술한 관리감독체계, 병원의 인력부족 이외에 공보의들의 도덕불감증이 겹친 결과다. 의사 자격증 소지자로서 군에 입대하는 대신 농어촌의 보건소에서 3년간 근무하는 공보의는 보건복지부 소속이나, 실질적인 관리감독은 시ㆍ군ㆍ구 보건당국이 맡는다. 그러나 지역 보건당국은 분기별 점검계획도 세우지 않고 현장점검도 하지 않은 것으로 감사 결과 드러났다.

이에 대해 대한공중보건의협회 관계자는 “도서지역의 경우 근무시간 외에도 관사에서 24시간 대기해야 하고, 공무원 신분이지만 주 40시간을 초과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초과수당이나 대체휴가가 없는 것 등 불합리한 처우와 비현실적 규정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고 주장했다.

정인화 중소병원협회장은 “중소 병원에선 야간당직이나 응급실에 근무할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 근무강도가 세서 의사들이 기피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공보의를 채용하는 경우가 일부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정 회장은 “공보의 불법 채용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특정 병원에 소속되지 않고 여러 의료기관에서 근무할 수 있는 ‘프리랜서 의사제’를 도입하는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감사원 관계자는 “대체복무를 하며 국민 세금으로 평균 150만원씩 월급을 받는 공보의가 근무지를 무단 이탈해 영리행위를 하는 것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전국에 5024명의 공보의가 근무 중이며 이 중 190여 명은 도서지역에 배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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