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임란 4백주년 한·중·일 관계사 재조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중국에 끼친 영향-최소자 교수(이대·중국사)>전비 천만냥…재정난 악화|요동방비 소홀 여진족 발흥
명나라의 조선출병은 자위적인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즉 왜의 침략이 중국본토로 확대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할 목적으로 출병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조선역은 1590년대에 일어난 소위 만력삼대정 가운데 기간이 가장 길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이나 군비 소모 또한 가장 많았다.
때문에 명나라가 망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고 흔히 말한다.
1592년은 명나라 신종(만력제)의 재위 20년에 해당되는 시기다. 그의 통치는 48년간 지속됐는데 적어도 1580년대 초까지는 내각수보 장거정의 개혁정치로 이른바 「만력의 치」란 이름에 걸맞게 볼만한 치적이 많았다. 정치상으로는 중앙집권과 관리기강의 개혁을 꾀해『비록 1만리나 떨어진 곳에서도 조정에서 하명하면 그날 저녁에 봉행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장거정이 사망(1582년)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황제는 정무를 제쳐둔 채 환관들에 둘러싸여 극도의 사치생활에 빠져들었다. 한 차례의 보석구입에 은 2천4백만냥을 쓰는가 하면 황태자와 제왕의 책봉·관혼례를 올리는데 9백34만냥, 의복을 마련하는데 2백70여만냥을 소비하기도 했다.
당시 명나라조정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은 조세였다. 경상지출은 궁정비용, 관리의 봉록, 군대의 급여 등이었는데 특히 종번의 수당이 많았다. 궁전의 건축비·전쟁비용 등은 임시지출의 명목이었다.
특히 96, 97년 불탄 이궁삼전(건청·곤령궁과 황극·중극·건극전) 신축을 위해 남방에서 재료를 징발할 때는 그 경비만은 9백30만냥이 들었다고 한다. 외방을 주로 한 전쟁비용 가운데 조선출병에 따른 경비는 1천만냥이 넘었다.
경상비지출과 더불어 이렇듯 1590년대 후반기에 임시지출이 대폭 늘어났던 까닭에 황실재정은 궁핍을 면할 수 없게 됐다.
어쨌든 만력제는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기존의 관료조직을 무시하고 환관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세를 거둬들였다.
이들은 개채·각세라는 이름으로 지방관리를 협박하고 공·상호를 강탈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이러한 무리한 세수정책은 상업 및 수공업 생산을 위축시켰음은 물론 도시폭동 즉, 민변을 전국적으로 야기시켜 명말청초에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민중반란의 단서가 되었다.
이른바 민변은 1596∼1620년에 걸쳐 전국 각처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동으로 산동 임청민변, 호남무창민변, 강소소주민변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징세와 관련, 특히 조선원군의 병참기지였던 요동·천진·산동지역은 고율의 세와 징병·요역(운송) 등 3중부담을 안아야 했으며 정유재란 무렵에는 금방이라도 민변이 터질 듯한 불온한 기운이 만연하고 있었다.
조선원군으로 참전했던 대다수의 장수들(양호·진린·유정·이여해 등)은 귀국 후 곧 제지역 반란진압에 참가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병들을 휘하에 흡수, 지방의 권력자로 부상함으로써 중앙권력에 맞서는 분권적 추세를 부채질했다. 임난 후 중국적 세계질서의 가장 큰 변화는 대녀진관계에서 비롯된다.
건주위 출신의 누르하치가 건국한 것은 1616년.
그러나 그는 1588년 건주위를 통합한 후 1590년대에는 해서위중심의 연합군을 공격, 복속시켰다.
그 무렵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전해 명·조선 조정에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1608년에는 마침내 명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그가 30여년만에 만주를 석권, 대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가 국내문제와 임난에의 참여로 요동방비를 소홀히 했다는데 일차적 원인이 있다.
특히 명은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주와 국내소요진압을 위해 초향·연향·요향 등을 징수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한편 명은 조선에 대해 왜의 재침을 경계하면서 만주지역의 변화를 엄중 감시토록 했다. 1618년 청과 싸움을 벌였을 때는 조선에 원군을 요청, 출정했던 강홍립의 군사는 결국 호란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 끼친 영향-김현구 교수(고대·일본사)>반전파 득세 풍신수길 몰락|과중한 군역…백성불만 고조
임진왜란이 일본에 미친 영향은 그 난을 일으킨 도요토미(풍신) 정권이 일본 역사상에 점유하고 있는 위치를 이해함으로써 바르게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12세기 말 일본 고대의 율령국가가 무너진 뒤 무가가 중심이 된 「막부체제」의 봉건사회가 성립, 19세기 말 메이지유신에 의한 근대사회가 출현할 때까지 7백년 가까이 계속됐다.
그 막부시대는 가마쿠라(겸창) 막부, 무로마치(실정) 막부, 에도(강호) 막부의 셋으로 나누어지는데 당시가 봉건사회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시대는 미숙한 봉건제사회 또는 전기봉건제사회라고 할 수 있고 에도 막부시대는 순수봉건제사회 또는 후기봉건제사회라고 할 수 있어 서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그 전·후기 봉건제사회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정권이다.
임진왜란에 즈음해 모든 영주들은 군역을 부담했는데 선봉역을 담당했던 구주·사국·중국지방 영주들의 경우에는 대개 소령의 수확량 1백석에 5인의 군역이 할당되었다.
근기이동에 영지를 갖고있는 영주들의 경우에는 임진왜란의 출병기지인 명호성에 집합, 상황에 응해서 출전하게 돼있어 서국영주들의 경우보다 군역이 가벼웠다.
그러나 이 때는 히데요시가 창건한 방광사의 대불전 조영이 최종단계에 들어가고 있었고 히데요시의 거성인 복견성 외곽공사가 시작되어 오우미(근강)영주 나쓰가 마사이에(장속정가) 등은 이미 이 두 공사의 부담을 지고있었으므로 동국의 영주들에게도 과중한 부담이 강요되고 있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에 있어서의 군역부담은 각 영주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와 같은 무리한 과역은 재생산구조를 크게 파괴하였으며 백성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그것이 무사들에게도 파급되고 다시 재지영주들의 저항과 상호대립을 불러일으켰다.
대륙침략을 적극 추진한 것은 중간파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등 대외무역과 관계가 깊은 서국의 영주들과 중앙집권파 이시다 미쓰나리(석전삼성) 등 히데요시의 막료들이었다. 이에 반해 병농분리과정에서 강제로 소령에서 분리된 소영주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상황에 직면해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를 비롯한 영국경영파에 속하는 동국의 영주들은 반대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과중한 군역과 국내의 불안 속에서 전세가 불안해짐에 따라 전쟁의 계속여부를 둘러싸고 부장들 사이에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강화쪽으로 기운 중앙집권파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항장)와 전쟁의 계속을 주장하는 중간파 가토 기요마사와의 대립이 심각하게됐다.
이와 같은 대립은 히데요시 사후 중간파 가토 기요마사 등이 영국경영파 도쿠가와이에야스 등 동국영주들의 편에 가세함에 따라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등 중앙집권파에 의해 뒷받침되던 도요토미 정권을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임진왜란에 의한 도요토미 정권의 붕괴는 곧 후기봉건사회의 에도 막부의 출현을 의미한다.
임진왜란은 에도 막부의 봉건적 지배이념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 연행된 포로 중에는 다수의 주자학자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는 1597년 전라도에서 도도다카토라(등당고호)의 군사에게 붙잡혀 이여국 대율에 연행된 강항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후에 교토에 이주, 거기에서 유학을 독자적으로 체계화하여 소위 경학파를 일으킨 후지와라세이카(등원성와)와 교류하였다.
그런데 그 때까지의 일본 주자학은 탁상공론의 학문이었는데 조선의 주자학은 국가지배의 실천을 수반하고 있었으므로 후지와라세이카는 그 응용을 강항으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일찍이 그 후지와라 세이카의 문인이 되어 주자학 국가지배의 실천에 대한 응용을 공부한 것이 하야시 라잔(임나산)으로 그는 에도 막부의 초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중용되어 4대 장군 이에쓰나에 이르기까지 시강으로 주자학을 강의하고 법령의 조사·제정, 구기의 교정·편집에 힘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