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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도 술인데 취해야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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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7면

“와인 골라봐.”

김태경·정한진의 음식 수다

서울 서교동에 있는 와인 바 ‘비나모르’(02-324-5152)에서 와인을 고르기 시작했다. 사실 나에겐 와인 고르는 일이 어렵다. 와인 책에 나오는 유명한 와인이 아니면, 와인 이름을 보고 고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선배님께서 고르시죠.”

공을 넘기고 나니 편하다. 프랑스에 있을 때도 와인을 고르려면 시간이 좀 걸렸다. 꽤 신중하게 고른 와인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예산이 제한되어 있었으니 그 한도 내에서 고르다 보면 맛이 들쭉날쭉했다.

“언제부터 와인 드시기 시작하셨어요.”

“십여 년 됐지. 일 때문에 위스키 좀 마시다 몸이 망가진 뒤부터.”

“이제 와인 좀 아시겠어요.”

“안다기보다는 즐긴다는 게 맞을 것 같아. 이것저것 마실 때마다 새로운 맛을 느끼는 게 즐겁잖아. 그러면서도 취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맞아요. 소주를 즐겨 마시지만 항상 같은 맛이라는 것이 아쉽죠. 표준화된 술맛에 익숙해져 있다고 할 수 있죠.”

정확히 말하면 희석식 소주다. 1965년 양곡관리법 때문에 쌀로 빚은 막걸리가 사라지자 고구마 주정을 물에 탄 싼값의 소주가 막걸리를 대체하게 된다. 전통소주와 청주들이 잊혀지게 된 것도 이런 이유다. 술을 만드는 곡물에 따라, 주조 방식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른 이러한 전통주가 활성화되었다면 아마도 우리 술 문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와인을 마시면서는 무언가 폼을 잡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것 같은데….”

“물론 술을 마시는 격식이라는 게 있지만, 너무 그 격식에 묶이면 술맛이 제대로 나겠어. 예전에 유럽 국가의 정상이 한국을 방문해 환영만찬을 하는데 우리나라 대통령은 와인 잔 다리를 잡고 잔을 드는데, 그 정상은 와인 잔을 손으로 감싸고 드는 장면이 뉴스에 나오더라고. 누가 보면 유럽 국가의 정상이 와인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그 나라에선 와인이 일상적인 술이잖아.”

“와인도 술이니까 편안하게 즐길 수 있어야겠죠. 와인에 대해 서서히 알아가는 노력도 있으면 좋고요. 그런데 무슨 와인이 인기다 하면 모두 그 와인만 찾고, 비싼 와인이 최고다 하는 경향이 있어요.”

“비싼 것이 맛이 좋긴 하지만 와인은 개성을 드러내는 술이 아닐까. 자기에게 맞는 것이 가장 좋은 와인인 셈이지.”

“제가 와인을 배울 때 프랑스 선생이 자신은 가장 비싸다는 ‘로마네 콩티’를 마셔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꽤 오랫동안 와인 강의를 하고 와인을 평가해온 이가 그런 말을 하니 적잖이 놀랐죠.”

“하하, 프랑스인들보다 한국 사람들이 더 많이 마셨을걸. 비싼 것이라면….”

“와인 소비가 몇 년 사이에 상당히 늘어났대요. 아마도 가격에 비해 질이 좋은 칠레 와인의 영향도 있겠지요.”

“그렇기도 하지만 와인에 끼여 있던 허영심이 걷히면서 와인을 제대로 즐기는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이겠지.”

간단한 저녁식사와 함께 한 술이 길어지면서 꽤 취하게 마셨다. 뒤에 마신 와인 맛은 희미하다. 멋있게 폼 잡으려고 했는데 술꾼은 별 수 없나 보다. 그래, 와인도 술인데 취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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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것 먹기를 낙으로 삼는 대학 미학과 선후배 김태경(이론과실천 대표)ㆍ정한진(요리사)씨가 미학(美學) 대신 미식(美食)을 탐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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