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칼럼] 다극체제 부추기는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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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의 대외정책은 3년 전부터 크게 바뀌었다. 공화당이 정권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신보수주의자들(neoconservatives)이 새 정권의 정책 기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해 엘리트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외교나 설득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연설 때 "당신은 우리 편이거나 적의 편 둘 중 하나"라는 식으로 거의 반(半)종교적으로 표현했던 이분법적인 절대주의를 믿고 있었다. 외교적 해결을 꺼리는 일부 전통적인 공화당 고립주의와 합쳐져 신보수주의자들의 영향력은 국가정책에 극적인 변화를 불러 왔다. 이는 9.11 테러 이후 더욱 그러했다.

부시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간에 만들어졌던 기존의 국제적 합의에서 교묘히 발을 빼는 것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행보를 제약하던 정치.경제.환경 협약을 부인해 버렸다. 군축 협약에 대해선 선을 그었고, 유엔에 대해선 '부적절하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이로 인한 파장은 국제사회에서 민주국가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던 미국의 입지를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신보수주의자들의 입김 속에서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에 군사적 대응을 택했다. 이 와중에 워싱턴은 국제사회와 분리됐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놀라운 승리를 거뒀지만 부시 행정부는 전쟁 이후의 상황에는 책임지지 않고 있다. 이라크에서 미국은 낙후된 군대를 손쉽게 상대했다.

신보수주의자들이 주도했던 이라크전과 대(對)테러전이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을 갉아먹고 있음은 이제 분명하다. 이라크전과 대테러전은 미국의 군사적 역량이 실제 미국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소용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라크 군정이 언제 마무리되든 미국의 힘과 권위는 쪼그라들 것이다. 미군은 이라크인들의 국가건설을 돕기 위해 남아 있다. 그러나 미군이 선한 의도로 주둔하고 있고 그간 어느 정도의 긍정적인 성과를 보여줬다고 해서 미군이 위협받는 상황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미군 주도의 군정이 연장되며 주권이양이 늦어지는 것은 숨길 수가 없었고 이로 인한 위험스러운 결과는 이미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미군 자체에 미친 악영향도 대단하다. 교체를 위해 본토로 돌아오는 미군부대들은 위기사태에 대비해 병력을 충원하고 훈련하기 부적합한 단계로까지 악화됐다. 예비군 역시 예상치 못했던 이라크 파병 때문에 전력이 상당히 약화됐다. 이라크전은 예비군과 정규군의 모병에까지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징병제를 부활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다. 최강이라던 미군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소련제국의 붕괴 이후 학자들은 국제사회의 두 가지 입장을 예견했다. 먼저 미국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인정해 워싱턴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힘에 대항하는 연합을 구성하는 것이다. 프랑스가 후자다. 러시아와 중국도 어느 정도 이런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힘을 과시하는 바로 그 방식 때문에 미국의 주도권은 약화되고 있으며, 예상치 못했던 약점이 드러나고 있다. 이는 다극체제의 부활을 부추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분명히 이를 좋아할 것이다. 아시아에선 미국이 테러리즘과 선제공격, 국토방어에만 신경쓰는 사이 중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 간에 벌어지는 무역갈등과 정치적 긴장은 워싱턴이 국제정치의 현실을 인정하기를 꺼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대테러전은 논리적인 분석에 기반하지 않은 일종의 집착임을 드러낸다.

물론 이 같은 상황전개만으로 지금의 국제질서가 바뀌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입지를 상당히 약화시킨다. 초강대국 미국이 그간 알았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렇게 강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이는 국제사회에 즐거움이나 안도감을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우려를 불러 일으킨다. 흔들리는 국제 질서는 불안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윌리엄 파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칼럼니스트
정리=채병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