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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슬렁거리세 우린 그러려고 태어났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호 20면

어둠이 걷히자 모래바람 휘몰아치는 사막이다. 극장 안에서 상상으로 만나는 너른 땅이 가슴을 열어젖히며 들어선다. 조선 후기 북학파의 대표 문인이자 사상가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걸었던 길을 따라나선 극작가 배삼식은 연암의 『열하일기』에 슬쩍 ‘만보’라 붙였다. 선생 뒤를 쫓아 어슬렁 한가롭게 거닐어보자는 말씀이다.
연암은 간 데 없고 말[言] 잘하는 말[馬] 한 마리가 나선다. 우울증을 앓다 콧잔등이 가려워 말을 하게 된 이놈 이름이 연암이다. 말씀이 제법 속이 찼고 요즘 식으로 치면 개그맨 뺨치게 사람을 웃긴다. 스스로 ‘소소(笑笑) 선생’이라 불렀다는 연암의 후예답다. 말이 말을 한다? 기존 질서가 지배하는 낡은 말을 깨고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했던 연암의 극적 등장이다.

열하일기만보(熱河日記漫步) #2007 극단 미추 정기공연 #25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평일 8시/ 토 3시, 7시30분/ 일 3시(월 쉼) #문의: 02-747-5161

말하는 말은 불순분자로 찍힌다. ‘밖의 것들’은 불순분자다. 마을을 율법사처럼 통제하는 장로들은 말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명령한다. 호탕한 웃음소리로 세상을 휘젓던 연암의 입이 묶이는 순간, 제국의 순회 어사가 들이닥친다. 어사는 황제 손아귀에 기이함을 모아주기 위해 586년 주기로 영토를 순회 중이다. 어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이한 것을 내놓지 못하면 제국 지도에서 마을을 통째 지워버리겠다고 으른다.
이 대목이다. 연출가 손진책은 어사와 마을사람들이 주거니 받거니 얘기 장면에 연암의 뼈있는 골계 정신을 되살린다. “이념이 옛날엔 흔했는데, 요샌 영 귀해져버렸어. 요샛것들은 이념은 고사하고 양념도 없이 아주 날로 먹으려 든다니까.” “이념이란 건 아리송해야 하는 거군요.” “대체로 그래. 앞뒤가 안 맞을수록 더 좋지.”

다시 입을 연 말(연암)은 주민에게 뒤집어엎자고 말한다. “지워지기 전에 지워버리는 것”이 연암이 내놓은 전략이다. 지우고 또 지우며 떠나는 것, 명분에 사로잡혀 굳어지기 전에 떠도는 것이 조선 중세 지식사회의 틀을 깨는 연암의 무기다. 지금 우리에게도 제국은 얼마나 많은가. 기이한 것을 내놓지 않으면 싹 쓸어버리겠다고 위협하는 목소리가 도시 사막을 울린다.

『열하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음식이 술, 제일 자주 쓰이는 낱말이 ‘포복절도’라 한다. 배를 안고 넘어질 정도로 웃기는가. 차라리 ‘뻥’이 심하다고 말하면 어울리겠다. 여기서 뻥, 저기서 뻥, 뻥쟁이가 준동하는 시절에 연암이 말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앓는 가려움증은 혹 아토피가 아니었을까. 술 잘 먹고 괴상한 얘기 잘하는 연암이 어슬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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