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문화 한반도진출 논란|상고사 세미나서 「도래인설」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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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원삼국시대(BC 2세기∼AD 3세기)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일본의 야요이(미생)문화를 탄생시켰다는 「도래인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오히려 일본의 규슈(구주)에서 발달한 문화가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정신문화 북진설」이 한 일본학자에 의해 제기돼 주목을 끌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23일 부산 동아대에서 열린 제7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발표회에 참석한 후쿠오카(복강)현 교육청 야나기타 야스오(유전강웅) 학예관이 「원삼국시대에 조선반도 남부에서 보이는 일본문화」라는 제목의 주제발표를 하는 자리에서 제기돼 함께 참석했던 우리 학자들과 열띤 논쟁을 벌였다.
야나기타씨는 이날 발표에서 『야요이시대 옹관묘와 여기서 나온 인골을 조사한 결과 도래인의 존재는 인정된다』고 전제하고 『도래인에 의해 벼농사, 대륙계 석 기등의 도구에 현저한 혁신이 이루어졌지만 일상 사용된 토기는 일본식 그대로였다는 사실로 미뤄 도래인의 수는 많지 않았으며 일본인들과 융합 가능한 정도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야나기타는 『야요이 조기·전기에 소수이긴 하지만 도래인의 분묘인 지석묘가 있으나 도래인의 묘에 꼭 도래인만이 매장된 것은 아니다』며 『도래인 인골의 발굴 예가 아주 적어 대거 건너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이 도래인의 문화전파설에 의문을 제기한 야나기타씨는 오히려 『한반도 남부에 일본인의 묘가 출현하고 있는 것으로 봐 일본인들이 적극적으로 선진기술을 구해 한반도에 진출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의 북부 구주지방에서 최초로 청동기가 부장된 옹관 형식을 김해식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 김해시의 김해패총에서 발견된 옹관에서 명명됐다. 이 형식의 옹관이 복강현·좌하현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한국에는 이 시기에 성인을 옹관으로 매장하는 풍습이 없었으므로 김해패총의 옹관을 기원전 2세기 일본인의 묘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 북부 구주의 옹관에 청동기를 부장하게 되는 같은 시기에 한반도 남부에 청동기를 다량으로 부장한 일본인의 묘가 출현하고 있는 사실도 일본인의 진출을 증명하는 것이다. 최근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내성유적에서 야요이 중기 전반의 토기군이 다수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인 기술자 집단의 생활지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어 반박에 나선 안춘배 교수(부산여대)는 『김해에서 발견된 옹관이 일본인의 것이라는 데는 동의한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내성유적이 일본인의 생활유적이라고 본다면 일본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숫자의 한식토기 출토 유적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궁금하다』고 반문했다. 이남규 교수(한신대)는 『내성유적에서 출토된 야요이 토기를 기준으로 그 유적들이 일본인기술자집단의 생활지로 판단하는 것은 너무 비약적 해석이며 기술자 집단이란 용어자체에 대해서도 구체적 해명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효택 교수(동의대)도 『제사용 청동무기류·거울의 부장 풍습과 함께 일본인의 일상습관적 정신문화까지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다. 이러한 풍습을 더욱 존중·심화하는 족이 북부 구주라고 하여 한반도 남부일원에서 발견되는 이들 유물을 일본문화로 파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한반도남부에서 이 시기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들이 이제 조사되기 시작하는 상태로 지금까지의 자료만을 토대로 한 양적 비교나 평면적 자료의 나열만으로는 실상 파악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 교수는 『야나기타씨의 「정신문하 북진설」은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오늘, 현대 일본의 물질적 우위에 고대일본의 정신적 우위란 옷을 입히고 싶은 심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못박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의식구조 차이에서 비롯된 주관적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김상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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