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이젠 EU와 FTA 전념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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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미 FTA가 발효되고 일본과 중국이 발 빠른 행보를 하면 유럽으로선 서비스.자동차 등에서 무역 전환 효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선 미국 수입차에 대해서만 관세가 철폐되면 가뜩이나 일본 차에 쫓기고 있는 유럽 명차는 무관세로 들어오는 미국 차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정부가 입법 추진 중인 외국법자문사법이 통과되면 유럽 기업은 거대한 한국의 자문 서비스 시장을 고스란히 미국 기업에 빼앗길 판이다.

이 같은 배경에서 유럽은 라미 독트린을 집어던지고 새로운 '글로벌 유럽' 전략을 채택해 동아시아 국가와는 처음으로 한국과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 EU로선 협상의 성사 여부가 아니라 '타이밍'이 문제다.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한국시장을 경쟁국인 미국.일본에 빼앗기게 된다.

앞으로 EU와의 협상은 한.미 FTA의 ±5% 수준이 될 것이다. 분야에 따라 미국과의 경우보다 5% 정도 덜 개방하거나 5% 정도 더 개방하는 것이다. 문제는 '플러스 5% 개방'이다. 이는 유럽이 초미의 관심을 갖고 있는 법률.금융.보험을 중심으로 한 서비스 시장과 정부 조달 시장 등일 것이다. 특히 정부 조달 시장을 완전 개방하고 있는 EU는 상호주의를 바탕으로 한국을 거세게 몰아붙일 것으로 예상된다. 다행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농산물시장 개방이 없지만 독일 토종 로펌을 초토화한 영국 대형 로펌의 파괴력을 가볍게 보아 넘겨선 안 된다.

우리로선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얻은 자신감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협상 전략을 잘 짜 '다급한 EU'로부터 뭔가를 많이 얻어내야 한다.

특히 EU 집행위의 이그나시아 가르시아 베르세로 동아시아국장은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웬디 커틀러와 달리 한국과의 협상뿐만 아니라 27개 회원국 대표가 모인 '133조 특별위원회'의 합의점도 얻어내야 하는 이중 부담이 있다. 이같이 복잡하게 얽힌 27개 회원국 간의 이해관계를 협상 전략으로 역이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정부는 대내 협상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직 한.미 FTA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유럽과 협상을 시작한다면 내용을 잘 모르는 국민은 막연한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국민에게 유럽과 손잡을 때의 경제적 효과뿐만이 아니라 예상되는 피해와 그에 대한 정부의 보상 대책에 대해서도 잘 홍보해야 한다. 이에 따라 앞으로 이어질 미국.유럽.캐나다 등과의 FTA로 피해를 보는 계층을 감싸줄 수 있는 보다 지속적인 제도적 장치로서 가칭 '종합 무역구조 조정법'의 입법이 시급하다.

EU와의 FTA는 기존의 서유럽 시장에서 우리의 입지를 공고히 할 뿐만 아니라 이제 막 문을 여는 신흥 동유럽 시장을 경쟁국인 미국.일본 기업보다 선점하는 효과가 있다. 이미 약 94억 달러를 유럽에 투자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한.EU FTA를 계기로 투자 장벽을 완화한다면 헝가리.체코 등 동유럽을 생산 거점으로 세계 최대인 유럽 시장을 공략하는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안세영 국제대학원 교수·국제통상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