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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맞더라도 연주는 마쳐야" 박해 속에서도 첼로 켜시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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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스승 로스트로포비치의 타계 소식을 프랑스 파리에서 들은 첼리스트 장한나(25)씨가 추모의
마음을 표현했다. 장씨는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로 대상을 수상한 후 그를 사사했고, 이는 세계적인 연주자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로스트로포비치와 음악적으로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가깝게 지내온 장씨와의 전화 인터뷰를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1994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 12살이던 제가 1차 예선의 연주를 마치고 무대 뒤로 들어왔을 때 선생님이 거기에 계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당신의 가슴높이밖에 오지 않는 작은 한국 소녀를 말없이 꼭 끌어안아 주셨죠. 첼리스트에게 신과 같은 존재인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한나시카'라는 러시아식 애칭으로 제 이름을 바꿔 부르시며 예뻐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믿기지 않습니다. 힘들게 음악을 하신 분이라 마음이 더 아픕니다. 고국 러시아의 정치 상황은 음악가를 내버려두지 않았죠. 구소련 시대 대표적 반체제 인사인 솔제니친과 사하로프를 공개적으로 옹호해 파리로 추방당하신 선생님은 저에게 "연주자의 길을 걷다 보면 비방과 방해에 시달릴 수 있지만 음악을 놓으면 안 된다"고 일러 주셨잖아요. "연주자는 돌을 맞아가면서도 연주를 끝까지 마쳐야 한다"는 말은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박해를 받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에게 들으신 말씀이셨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1989년 11월 12일 로스트로포비치는 현장으로 달려가 즉석연주를 했다. 연주곡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인류애와 역사적 사명감이 담긴 이 모습은 전세계에 TV 생중계를 통해 전해졌다. [로이터=뉴시스]

첼로 곡만 120여곡을 초연하시고 지휘자로도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 모습은 제게 큰 자극이 됐습니다. 워싱턴, 모스크바, 뉴욕으로 제가 레슨을 다닐 때면 늘 같은 곡을 매번 다르게 연주하도록 주문하곤 하셨죠. 손가락 번호도 바꾸고, 템포도 다르게 해보고. 어린 저에겐 참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연습해보면 네가 어떤 음악을 원하는지 알게 될 거다"라는 말씀은 적중했습니다. 저의 첫 데뷔 앨범을 선생님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와 내고 저는 부쩍 성장했습니다.

선생님께 정식으로 레슨을 받은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제가 14살 때, 선생님은 "오늘이 마지막 레슨"이라고 하시며 "이제 음악의 열쇠를 줬으니 네가 문을 열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제가 선생님 계신 곳을 쫓아가 "당장 첼로 들고 가겠다"고 해도 받아주시지 않으셨죠. "스승 없이 음악을 해야 진짜 성숙할 수 있다. 이제 가르칠 것을 다 가르쳤다"고 하시면서요. 하지만 그 후에도 제 연주에 와서 들어주시고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초콜릿도 주셨죠.

4년 전 뉴욕에서 뵈었을 때는 저를 번쩍 드시면서 "너무 가볍다. 밥 많이 먹어야겠다"고 하셨죠. 그런데 지난달 크렘린궁에서 푸틴 대통령이 베푼 생일잔치에 참석하신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야위신 모습을 처음 본 저는 한동안 마음이 아팠답니다.

선생님, 지금 저는 선생님과 처음 만났던 파리에 있습니다. 유럽 연주를 막 마쳤습니다. 장례식에라도 참석하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네요. 다음 무대에 설 때는 선생님 생각만 날 것 같습니다.

김호정 기자

◆ 로스트로포비치 = 1927년 구소련 연방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태어난 그는 45년 소련 국제음악콩쿠르에서 황 금상을 차지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소련의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최고의 음악가들을 사사했다. 간장 질환으로 러시아 남부 종양전문센터서 입원치료 도중 27일 타계했다. 옐친,체홉 등이 묻힌 모스크바 시내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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