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뇌인지이야기

망가지는 기억의 사령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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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러나 별로 부지런하지도 않은 천성에 우수하지도 않은 머리로 외국에서 오래 공부하다 보면 스트레스 받을 일도 정말 많았던 것 같다. 원래 좋지 않았던 나의 기억력은 이제는 심하게 형편없어졌다.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이 영 외워지지 않아 민망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해마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그 대답을 알려준다. 약간의 스트레스는 원래 사람들을 정신 바짝 차리게 하고 그러면 기억도 잘된다. 심한 장기적 스트레스는 우리 몸에서 비상시에 내놓는 코티졸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게 한다. 이 스트레스 호르몬은 뇌로 갈 중요한 영양소를 몸으로 보내 위기에 대처하게 하지만, 이 호르몬이 뇌에 오래 남아 있으면 뇌 속에서 아주 민감한 세포인 해마세포가 가장 곤경에 처하게 된다. 특히 해마는 다른 뇌 부위에 신호를 보내 스트레스 호르몬이 그만 나오도록 제동을 걸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참, 아이로니컬하다. 망가진 해마로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의 제동력이 나빠질수록 악화되는 것이 어디 기억뿐이랴. 나이 든 사람일수록 이렇게 손상된 해마세포가 많고,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에 대한 제동은 더 나빠지고, 그래서 계속 더 많은 해마세포가 망가진다. 결국 장기적인 스트레스와 함께 나이가 먹어가면 기억과 다른 인지 기능이 계속 나빠진다는 이야기다. 해마를 또 열심히 쓰면 세포도 좀 생긴다니 희망을 걸어 보자.

그렇지만 요즘의 아이들은 너무 일찍부터 이 스트레스 호르몬에 흠뻑 젖어 사는 것 같다. 실력이 아니라 성적을 남보다 앞세우려고 초등학교 이상의 어린이들은 선행학습이다 조기유학이다 하면서 비싼 돈 주고 학원과 타지로 몰려다니며 살고 있다. 또 숙제는 얼마나 많은가. 숙제가 적으면 우리 엄마들은 불안해 학습지를 더 시켜 준다. 스트레스 호르몬 수준이 높으면 알고 있는 기억도 인출이 잘 안 된단다. 과연 우리 아이들 시험은 잘 볼 수 있을까? 거의 고개를 떨어뜨리고 살고 있는 어린아이들. 안 그래도 이해력보다 앞서는 교과 내용을 주입받고 있는 아이들. 이해하기보다는 외우는 것으로 때우면서 사고력 성장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들이 중년이 되었을 땐 어떤 사고력에 어떤 건강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 있을까? 장기적 국민 보건 관점에서 지금부터 이 맹목적인 교육제도에 누가 제동을 걸어야 한다. 스트레스로 망가진 해마가 더 이상 스트레스 호르몬 제동능력을 상실하고 악순환에 빠지는 것처럼, 우리의 학부모와 아이들은 무한 경쟁 속에서 그 제동력을 상실하고 살고 있다. 그들의 중년과 노년의 두뇌와 신체 건강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강은주 강원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