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신청 북 유학생(김명세씨가 보내온 편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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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한도 곧 변화… 가족상봉 확신”/귀향날짜 압박감속 신앙에 눈떠/소 붕괴 충격 작년 10월 최종결심
유학생 김명세씨 망명신청 사건이 사건발생 7일째인 11일 현재까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김씨는 9일 오후 피신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심경과 망명배경 등을 설명하는 글을 모스크바 김석환특파원을 통해 중앙일보에 전해왔다. 그는 자신의 망명신청이 삶과 내일에 대한 희망도 없이 억눌리고 결박된 2천만 북한동포를 암흑에서 구원하기 위한 결단이었다고 밝혔다.
러시아로의 망명을 위해 이 목사님의 아파트로 은신한지 5일째.
오늘도 창밖의 햇살은 눈부시다.
밝은 햇살 때문인지 길가의 가로수며 어린이들의 뛰노는 모습도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러한 풍경과는 달리 무척이나 스산한 상태다.
러시아정부에서 과연 나의 망명신청을 받아들여줄지 걱정스럽고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나 때문에 받을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6월12일이면 만 두살이될 아들 광성이와 아내에게 특히 미안하며 연금생활을 하시고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우리 가족의 이러한 고통과 헤어짐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동안 동구와 소련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얻은 확신이지만 북한의 변화도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족의 재상봉도 틀림없이 다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나의 문제로 깊은 관심을 보여주시고 있는 남한의 동포들에게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내가 왜 망명을 결심하게 됐으며 하필이면 남한이 아닌 러시아로 망명을 결심하게 됐는지 이 기회를 이용해 설명드리고자 한다.
나는 평양시 중구역에서 살다가 87년 9월에 소련 유학생으로 선발돼 모스크바에 왔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지구물리학을 전공했던 나는 소련에서도 지구물리학을 공부하기로 하고 모스크바종합대학 대학원과정(북한에서는 연구생과정)에 입학했다. 모스크바대학에서는 87년 10월부터 91년 10월까지 기숙사 B동 5백26호실에서 살았다. 당시 나는 독실을 사용했다. 모스크바대학 기숙사에는 북한 유학생이 25명 정도 있었다.
북한에 꼭 필요한 학문을 위해 우리들은 열심히 공부했다.
89년 7월 방학이 되자 나는 친구들과 함께 평양으로 갔고 8월에 결혼했다. 9월까지 평양에 있다가 나는 다시 모스크바로 왔고 아내는 평양에 남게됐다.
북한에서는 독신자들을 유학생으로 잘 내보내지 않으며 특히 연구생(대학원생)의 경우는 가정이 있어야만 한다. 또 유학생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성적이 좋아야 하고 성분·친척확인,당위원회 보증 등이 필요하다.
91년 중순 이후에는 여기다 처의 보증까지도 요구하게 됐다. 즉 남편을 유학보낼 경우 남편이 망명하거나 도망칠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부인이 직접 보증서야 하는 것이다. 내가 나올 때에는 이러한 보증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91년 6월에 평양에 갔다온 친구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게됐다.
이런 저런 이유로 북한에서 온 유학생들은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학생들 가운데 동유럽 및 소련의 변화로 동요하는 학생들이 나타나게 되자 북한은 90년 7,8월께부터 중국을 제외한채 소련을 포함한 동구사회주의국가들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을 전부 소환했다.
당시 소련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에게 북한당국은 사상학습하고 다시 돌아간다고 하면서 짐을 그대로 두고 평양으로 오라고 했다.
소련의 경우는 대부분 조기에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상황도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나 소환되었던 유학생들이 모스크바에 귀환하기 직전 한소수교가 이뤄져 긴장이 고조됐다. 이에 따라 학부유학생들은 그냥 북한에 남고 연구생·실습생들만 10월 이후부터 모스크바로 돌아오게 됐다.
북한에서 돌아온후 나는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변화하는 상황과 북한의 현실을 비교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91년 12월까지는 무슨일이 있어도 북한으로 돌아가도록 돼있었기 때문에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산란해졌다. 91년 10월이 되기까지 나의 마음은 가족·친척들에 대한 걱정 등으로 결심을 하지못한채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마음이 심란해지면서 이때부터 종교에 관심을 갖게됐다. 또한 성경책도 알게 됐고 모스크바대학에서 멀지않은 곳의 노브데비치 수도원에도 자주 가보게 됐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신앙에 빠져들게 됐고 91년 10월에는 망명하기로 최종적인 결심을 하게 됐다.
내가 망명하기로 최종적인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북한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고 러시아에는 신앙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북한이 추종해온 소련의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을 보고 흔들린 마음이 종교를 통해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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