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학내에 인공기가 웬말인가(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마침내 학내 시위에 인민공화국 깃발이 등장했다. 이른바 남총련 전야제와 조통위 발대식을 갖는다는 집회에서 학생들이 미리 준비한 대형 인공기를 흔들었다고 한다. 물론 이 자리엔 태극기와 남북단일기도 함께 등장했기 때문에 남과 북을 국가로 인정한다는 의미와 남북의 화해를 위한 학생들의 통일의지라는 선의의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학생들이 비록 3분이라는 짧은 기간에 흔들어 보인 인공기라 하지만 한국전쟁을 체험한 세대들에 있어 인공기는 단순히 한 나라의 기이상의 섬뜩한 느낌을 받게 된다. 붉은 바탕위에 그려진 별 그림은 수백만의 목숨을 전장에서 숨지게 하고 1천만 이산가족을 낳게한 상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태극기가 일제 항쟁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한민족의 국기라면,인공기란 우리에게 있어 전쟁과 살육을 떠올리는 깃발의 의미로 남아 있다. 학생들이 그것도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통일의 움직임을 보이겠다는 의지로 집회를 갖는다면 인공기를 흔들며 남쪽의 레드콤플렉스를 자극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화해의 길을 여는 모임이 아니라 다시 한번 더 지난날의 악몽과 전쟁의 깊은 상흔을 일깨우는 공격적 투쟁의 의미로 각인될 뿐이다.
전대협을 비롯한 학생단체들이 벌여온 여러형태의 통일노력을 보면서 우리가 수없이 언급하고 주장해온 바는 통일을 향한 주장과 행동이 결코 감정에 이끌려 충동적이거나 공격적 형태를 띠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감정보다는 이성으로,급진적이기 보다는 점진적으로,일방적이기 보다는 상호주의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 통일을 위한 기본자세임은 이미 국민적 합의로 이룩된 통일관이다.
통일을 위한 학생집회에서 인공기를 동원하는 발상은 우선 통일을 이성보다는 감정을 자극하는 공격쪽으로 몰고가겠다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남쪽의 일부 학생들이 인공기를 휘날렸다는 사실은 상호주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남쪽에 인공기가 등장하면 북쪽에서도 태극기가 휘날려야 마땅하지만 오늘의 북쪽 사정이 그렇질 못한건 학생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또 인공기를 흔들며 북으로 가자고 학생들이 외칠때,그나마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화해와 교류의 움직임마저 냉각될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독일 통일에서 보듯 통일을 향한 경제적·사회적 부담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젊은이들의 무분별한 감정적 통일자세에 환멸을 느끼게 되고 통일의 의욕마저 상실할 소지도 있다.
따라서 학생집회에서의 인공기 등장은 남북의 화해 측면에서나,통일 분위기 조성을 훼손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다시 있어서는 안될 반화해,반통일적 행위임을 학생들은 이 기회에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