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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 "81년10월 물러나겠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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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야당은 납작 엎드려 있었다. 유신선포(72년10월17일) 당일까지도 국정 감사를 하느라 전국의 일선관청을 돌며 불호령을 내리던 신민당의 서슬은 온데 간데 없었다.
『국민의 기본권이 통제 받고 버림받는다면 전체주의 국가와 다름없지 않느냐는 불평 아닌 의혹이 누가 시키지 않은 채 마음속에서 일어날 때 국가의 기초나 민주주의를 흔들어 놓을 소지가 있다고 보지 않느냐』
73년5월 국회본회의에서 유진산 신민당총재가 이리 돌리고 저리 피해가며 한 체제관련발언이 그나마「초강성」으로 꼽혔다. 그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해를 넘기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야당 내 당권경쟁은 선명성여부를 축으로 전개됐고 연이은 긴급조치선포와 정보부의 공작정치, 대학생들의 저항(민청학련사건), 미국의 민주화압력 등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갔다.

<"정치적 반란" 포문>
74년 8월10일 유정회는 공화당과 합작해 신민당이 내놓은 긴급조치 해제 건의안을 국회 법사위에서 필사적으로 부결시켰다. 그러나 그 직후인 8월10일 박대통령이 긴급조치1, 4호를 전격 해제함으로써 닭 좇던 개 모양을 면치 못했다. 육영수 여사 피격(8월15일)이라는 변수가 있기는 했으나 유정회 의원들로서는 새삼 비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법안이나 정책을 심의하는 도중 누군가가 반대의견을 내놓아 논란이 시작될라치면 제안자는 말없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어 청와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쯤 되면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요 』(이범준 전 유정회 의원)
74년12월14일 정일형 의원 발언 사건이 터졌다.
『인생을 살만큼 살아온 선배의 입장에서 세상의 권세를 누릴 만큼 누려온 박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문제의 해결책을 함께 찾아보고 싶은 충정에서 몇 말씀 하고자 한다』고 서두를 꺼낸 정의원(당시 7O세)은「독한」발언들을 서슴없이 토해놓았다.
「10월 유신은 정치적 변란」「유한한 인격의 지도자가 무한한 국민의 정부를 영구히 통치…」「매카시즘적 수법」 「경북 선산 땅에서 쟁기질하는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일련의 발언이 급기야 『대통령 하야준비 용의 여하…』 에 이르자 공화· 유정회 의원들이 단상으로 쏟아져 나와 수라장을 이루었다. 남들보다 날쌔게 단상으로 돌진했던 정재호 의원(유정회)이 「비호」라는 별명을 얻어들은 날이었다.
야당의 체제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75년 10월8일에는 나중에 「10· 8파동」이라는 호칭의 어감이 좋지 않다 해서 당사자의 이름을 따 「김옥선 파동」이라고 불린 폭탄발언이 나왔다. 94회 정기국회의 본회의 대 정부 질문.
『오늘날 나라 안팎에서 우리체제를 가리켜 독재 체제라고 공공연하게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명백하고도 단호하게 부인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이제는 아주 드러내놓고 독재정치를 할 정도로 배짱이 두둑해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사실은 독재정치라고 생각하면서도 왈가왈부하기가 양심상 거북해서 그러는지 좀 알아보아야 되겠습니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는 북한을 좌익 독재주의로, 한국을 우익독재주의로 설명하고 박대통령을 「딕테이터(독재자)박」 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김금옥선 파동」까지>
『지난 한여름 전국을 뒤흔든 각종 관제 안보궐기대회, 민방위대 편성, 학도호국단 조직, 요즘도 텔리비전에 나오는 군가, 그리고 정부의 끊임없는 전쟁위협 경고발언,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안보를 앞세운…』발언은 여기서 끊겼다. 불과 8분만에 정회가 선포됐다. 회의는 속개되지 않았다.
김옥선 전 의원(58·여)의 회고.
『체제도전은 그때 신민당의 당론이었습니다. 발언 원고는 기자단에도 사전 배포하지 않았어요. 원고 작성 과정에서 당시 두 일간지 정치부의 박모· 이모기자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들은 끝까지 비밀을 지켜주었습니다. 툭하면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던 시절이라 국회발언이 있기 며칠 전에 건강진단을 받아 두었지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판정이 났습니다. 그래야 끌려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나중에 근거가 될 것이라는 각오였어요』
김의원의 건강진단을 해주었던 정환영 박사(65·현 한양대부속병원 신경외과과장)는『발언 파동 후 정보부 요원들이 찾아와 김옥선과 무슨 관계냐, 언제부터 알게됐느냐 등등 귀찮을 정도로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기억했다.
박대통령은 분노했다. 청와대와 남산에서 여당 총무(김룡태)를 앞세워 5일간 바삐 뛴 끝에 사태는 김의원이 13일 의원직 사퇴 서를 제출, 금 배지를 떼어버리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처음에는 순사도 마다 않을 것 같던 동료 야당 의원들이 권력 상층부의 초 강경 기류에 놀라 금방 꼬리를 내린데 대해 김씨는 지금도 어이없어 했다.

<79년 정초에 밝혀>
사태 진행 도중 안국동 신민 당사에는 욕설 섞인 문구와 함께 면도날을 동봉한 편지가 여러 통 날아들었다. 『여자(김옥선)가 저런 배짱을 보이는데 남자의원들은 무엇하고 있느냐. 잘라 버려라』는 「거세용」 면도날이었다.
75년 초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국민투표 (2월12일· 찬성률 73%)를 통해 박대통령이 노렸던 약효는 김옥선 파동을 계기로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더했다. 아무리 동맥경화상태의 1인 체제였다지만 방대한 정보망으로 민심의 추이를 늘 점검하는 청와대가 이를 감지하지 못할리 없었다.
7O년대 후반기에 들어 박대통령은 조심스럽게 유신헌법개정을 포함한 「체제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자신의 퇴임시기도 구체적으로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언론인 (조선일보 정치부장)출신으로 71년부터 8년간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선우련 전 의원(63·현 언론인 금고 이사장)은 취재에 응하면서 『처음 털어놓은 얘기』 라며 주목할 만한 증언을 했다.
『박대통령의 하야예정일은 1981년10월1일 (국군의 날)이었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79년1월1일이었어요. 신정을 맞아 부산에 내려가 있던 대통령께서 정인형 경호처장을 통해 나를 호출했습니다. 「잠깐 다녀가라」는 것이었어요. 아침에 국립묘지 참배를 마친 뒤 낮 비행기편으로 부산에 갔습니다. 각하 일정에 맞추어 그날은 숙소인 해운대 조선비치호텔에서 자고 다음날 오전 7시30분쯤 호텔 코피 숍에서 대통령을 만났습니다』^^<사진>"뭘 생각할까"|67년4윌125일 제6대 대통령선거 유세도중 카메라에 잡힌 김종필 공화당의장·박대통령·육영수 여사(왼쪽부터). 박대통령은 집권기간 내내 JP를 견제했으나 결국은 그를 후계자로 점찍었다는 증언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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