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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미국인의 슬픔, 한국인의 애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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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 수도 워싱턴의 턱밑에 있는 버지니아주는 교육이 좋고 평화스러워 수 년 사이 한국인이 부쩍 몰려든 곳이다. 바로 그곳의 평화스러운 대학에서 한국 동포 학생이 총질을 해댔다. 미국의 젊은 꽃 30여 송이가 스러졌다. 죽거나 다친 미국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유족과, 그들의 나라에 우리는 동맹 차원을 뛰어넘는 인류애적(的) 애도를 보낸다.

사건의 본질은 반(反)사회적 성격을 지닌 외톨이 이민자 학생이 정신착란적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갈등관계에 있는 집단이 아니라 그저 정신이 훼손된 한 나약한 인간이 벌인 일이다. 그런 일은 다른 아시아인이나 히스패닉 또는 여느 흑인.백인도 저지를 수 있다. 화가 나더라도 총을 쉽게 구할 수 없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란 얘기도 맞다. 사건의 이 같은 성격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성과 논리로만 다룰 수 없는 다른 무엇이 사건의 주변에 있다. 동기가 개인적이라 해도 결과가 너무 위중하고 집단에 영향을 미친다. 사건 자체도 심각하지만 앞으로 생길 수 있는 파장도 염려스럽다. 미국인은 대부분 이성적으로 처신할 것이다. 그러나 거리에서 마주치는 한국인의 얼굴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조승희'가 떠오른다면 우리 동포들에게 영향이 없을 것인가. 한국 정부와 국민이 애도에 주저하지 않는 것은 양국의 이런 연관성 때문이다.

한국은 애도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세 차례나 애도를 표했으며 부시 미 대통령에게 조문을 보냈다. 대선 주자들도 묵념을 올렸고 군 수뇌부는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위로 서한을 보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인터넷에 위로와 애도의 심정을 쏟아내고 있다. 곧 젊은이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모여들지도 모른다.

슬픔의 다음에는 무엇이 와야 할까. 한국에는 비 온 뒤 땅이 더 굳어진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과 미국인은 이번 일을 슬픔의 강을 넘어 양국 동맹과 친선의 대지가 더욱 굳어지는 계기로 만들어야 된다.

두 나라가 가장 먼저 할 일은 250만 재미 동포.유학생의 충격과 불안을 헤아리는 것이다. 미국인 사이에서 혹여 이번 일을 한국인에 대한 적대적 행위로 확대하는 어리석고 비(非)이성적인 일이 있어선 안 된다. 많은 한국 동포가 불안감과 불편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미국 정부와 시민은 그들의 이웃인 한국 이민자.유학생들을 보듬어 주어야 한다.

한국 정부와 민간사회는 이번 일이 양국 관계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도를 미국인에게 감동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이태식 주미대사는 한국 교회들에 32일간의 릴레이 금식을 제안했다. 그는 "지금은 우리가 가치 있는 소수 인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영혼을 새롭게 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돼 동맹이 격상되고 한국인에 대한 미국의 비자면제 협정을 위한 분위기가 무르익던 차에 이번 일이 터졌다. 이번 사건이 두 가지 중요한 과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도록 양국 정부.의회는 사태를 차분히 관리해야 한다.

미국인의 쓰라린 상처를 달래는 가장 효과적인 손길은 아마도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일 것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슬픔을 함께하며, 정신적 책임을 느끼며, 미국 사회의 치유에 동참할 의지가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미국인과 함께 기도하고, 추모.장학 사업을 기획하고, 재발방지 방안을 고민하고, 각자가 살고 있는 지역의 자원봉사 같은 일에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양국의 정부와 국민, 한국 동포들이 마음과 지혜를 나누면 '잔인한 달'에 스러져간 30여 송이의 꽃들은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한 소중한 헌화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