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비위한 긴급진단/벼랑에선 교육:1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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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시·통제 일변도… “가르치는 로봇”/학부모·상급자들 눈치보며 타율 적응/교직원 회의도 일방통행… 제기능 못해
○으름장 놓는 부모
서울 M국교 김모교사(30·여)는 지난달 교원인사때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2년만에 지금의 학교로 비정기 전보발령을 받고 교직에 심한 회의를 느끼고 있다. 김교사는 90년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 6학년 담임을 맡아왔는데 한 여학생이 수업도중 심하게 떠들어 수차례 주의를 줬으나 말을 듣지 않아 앞으로 불러내 매로 엉덩이를 두세차례 때린 적이 있었다.
그후 이 여학생은 이틀간 결석후 어머니가 딸을 학교로 데려와 곧바로 교장실로 가서는 다짜고짜 『우리 아이를 병신으로 만든 교사에게 아이를 맡길 수 없으니 담임을 바꿔달라』고 윽박질렀다. 담임이 아이를 심하게 때려 월경불순이 됐다는 것이다. 만약 담임을 바꿔주지 않을 경우 이 사실을 교육청에 알려 파면시키겠다고까지 으름장을 놨다.
아이는 양호교사가 한달간 병원을 데리고 다니면서 치료를 끝냈다. 의사의 진단은 월경초기에 약간 자극을 받았을 뿐 별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후유증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담임을 상대로 거액을 요구하는 한편 상급기관으로 탄원서를 내는등 계속 김교사를 괴롭혔다.
김교사는 하루에도 수없이 사표를 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이런 일로 평생직으로 생각하고 있던 교직을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버텼다.
○결국 타교로 전임
그러나 이듬해까지도 그 학부형은 김교사를 다른 학교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면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결국 김교사는 지금의 학교로 밀려나고 말았다.
김교사의 경우는 교사들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지시·통제일변도의 경직된 학교체제에서 교사들은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로봇」에 불과하고 때로는 김교사처럼 학부모에게까지 교권을 침해당해도 어디하나 막아줄 기관도 없는 실정이라는 하소연이다.
학교교육에서 교사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장 핵심이 되는 주체다.
그 주체로서의 권리는 「신성한 교권」으로 보호받아 마땅하며 그것은 교직이라는 직업의 특수한 책임과 전문성에 기초한 자율을 본질로 한다.
크게는 교육과정의 운용에서부터 작게는 학교운영의 실무적 의사결정에 이르기까지 교사는 당당한 주체로서 기능하고 대접받아야 한다.
그러나 앞에든 김교사의 사례에서 보듯 우리 교육현장에서 교사의 위치는 그같은 당위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교과과정의 편성,진도조정,수업방식에 이르기까지 교육부를 정점으로한 관료조직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를 모두 정해놓고 전국의 초·중·고교를 통제하는 체제가 일제이래 유구한 전통으로 굳어져 있다.
서울S고 이모교사(31)는 『나름대로 입시위주의 수업에서 탈피하고 토의위주의 수업을 진행하고 싶어도 학교에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다』며 『이 때문에 교사들 사이에는 「대충 철저히」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을 정도로 교사들이 사기저하는 물론 의욕마저 잃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의 유일한 의결기구라 할 수 있는 교직원회의도 사실상 교장·교감의 지시나 훈계,정부시책의 일반적 전달을 위한 장소일뿐 진정한 회의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일방적 지시 많아
지난해 한국교총이 전국의 초·중등교사 2천명(교사 1천5백,주임교사 4백,교장·교감 1백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교직원회의에서의 의사결정방법을 묻는 질문에 「교장·교감과 상의하여」가 41.3%,「교장단독으로」가 22.8%,「교감과 상의하여」 20.5%였으며 「다수결 원칙으로」는 15.3%에 불과,교직원회의가 여전히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교육부­시·도교육청­교육(구)청­교장순으로 결정된 「지시전달체계」가 일선학교에서는 교장­교감­주임교사­교사­학생순으로 그대로 이어져 모든 행정체제가 통제와 일사불란한 획일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
○세대차로만 치부
이를 통해 볼때 일부교장들과 원로 교사들은 젊은 교사들과의 갈등을 단순히 세대차로 치부하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교육현장을 짓누르고 있는 교육관료들의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 확연해 진다.
이같은 교장들의 통제위주 학교경영에 반발하는 일부 젊은 교사들을중심으로 「학교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차츰 커지고 있다.
지난달 서울Y고 교무실에서 월례직원조회를 주재하던 김모교장(63)은 교사들에게 『수업시작전에 꼭 칠판에다 수업목표를 쓰시오』『앉아서 수업하지 마시오』『수업계획서를 철저히 확인받도록 하시오』라고 지시했다가 30대 교사들과 한차례 입씨름을 벌였다.
『이런 식의 일방적 지시를 하려면 교직원회의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직원회의를 의결기구화해 평교사의 의견도 수렴돼야 합니다. 학교운영결정권을 교장이 모두 쥐고 있으니 교사들의 자율·참여권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의결기구는 대표성이 있어야 합니다. 학교의 대표는 교장이지 어떻게 교사가 학교의 대표성을 가질 수 있습니까. 제도적으로도 결정권은 교장에게 있지 않습니까.』
○시급한 위상회복
아직도 논쟁거리로 남아있는 전교조문제도 바로 이같은 인식과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이다. 아직도 일선학교 운영은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못한채 마찰과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태식 한국교총연구원은 『교사의 자율성은 교육활동의 전반에 걸쳐 보장되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교육자로서의 능력과 도덕성을 토대로 하여 학교경영이나 교수행위에 있어서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참여가 이루어졌을때 정상적인 교육체제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교육」이 있어야 할 곳을 차고 앉은 「행정·통제제일주의」. 많은 교사들은 교사로서의 진정한 위상과 책임·권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이같은 교육현장에서의 비민주적인 요소는 없어져야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정재헌기자>
◎제도·사회풍토 개선… 교사 전문성 확보도 과제/허병기 한국교총교육정책연구소 전문위원(전문가진단)
교사의 자율성은 교육의 본질적 성격과 직결되는 것으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인간의 성장을 지향하는 교육활동은 그 본질적 특성상 복잡하고 어려우면서도 창의적인 접근이 요구되어 거기에서는 필연적으로 교육담당자의 전문성에 기초한 자율성이 요청된다.
교사의 자율성이 이처럼 교육의 본질적 성격에 기인하고 있기에 그의 자율성의 박탈되거나 부당히 제한될 경우 그것은 곧 정상적인 교육의 실패나 손상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교사들은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 정당한 자율성을 박탈당하거나 제한받고 있다. 교육당국,재단,학교장 등에 의한 일부 불합리한 교육 혹은 학교 관리와 교사의 교육행위에 대한 지나친 통제,교사의 교육활동에 대한 학부모의 부당한 간섭과 교권침해,여러 교육 및 사회제도와 관습에 의한 보이지 않는 활동제약 등으로 말미암아 현재 우리나라 교사들은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할 자율성을 크게 재한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에서 앞으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울여야할 노력의 주요방향내지는 유의점에 해당한다고 보이는 몇가지 사항들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교사들의 자율성을 회복하고 확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기본전제가 되는 전문성의 확보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교사들의 그러한 전문성 신장을 위한 여건들이 충실히 갖추어져야 한다. 교사의 자율성 확대는 당위적인 요구이고 다른 어떤 주장보다도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것이 만약 전문성 확보라는 필연적 전제조건을 무시한 가운데 주장된다면 그 당위성과 호소력은 무기력하고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둘째,명실상부한 교육의 정상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련제도 및 사회풍토의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다양화·개성화·인간화 등 교육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들이 경시되고 있는 우리의 교육현실을 하루속히 개선하는 것이 교사의 자율성 확보에 또하나의 중요한 관건이 되는데,이를 위해서는 관련제도 및 사회풍토와 관습들이 바람직스러운 방향으로 개선,변화되어야 한다.
셋째,교사들을 관리·감독·지원하는 위치에 있는 집단들의 의식이 교사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교사의 전문성과 교육책임능력이 실질적으로 향상되고 관련제도들의 개선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교사들을 직접 관리·감독·지원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올바로 정립되지 않으면 교사의 자율성 확대는 또다른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의 의식은 교육의 본질적 성격과 그에 따른 교사의 자율성 요구를 이해하는 방향으로,또 교사들의 자율적·창조적 교육행위를 적극적으로 배려하고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끝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사 자신들의 자기노력을 통한 신뢰의 형성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사들이 응분의 자율성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 여러 이유들이 교사집단 외부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교사들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교사들은 자율성 행사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인 전문성 신장을 위한 자발적인 노력을 보다 많이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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