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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방해로 각국 기술제공 취소 덜 민감한 핵 시설 투자로 선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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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방한당시 46세)은 미 원자력위원회 위원장과 CIA국장을 역임한 핵 문제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버드대 동창인 키신저 국무장관과의 불화로 75년11월 포드행정부에서 밀려난 뒤 카터 정권 때는 다시 에너지장관으로 기용되었던 인물이다. 공산권에 대해 특히 강경한 매파로 알려진 그는 한국방문 기간 중 조선호텔에서 열린 만찬에서 『공산주의자들은 한 울타리 속에 곰과 양을 함께 가두고 이를 평화공존이라고 하는데 동물원장에게 물어보니 매일 아침 양을 새로 갈아 넣어줘야 한다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핵무장 포기 안해">
당시 제8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이례적으로 한국을 찾은 슐레진저는「한국은 핵무기를 자체 개발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비밀리에 받아낸 대가로「북한 도발시 선제핵사용 가능성」 「한국 수도권방위 9일 속결 전」등 그즈음 우리나라 신문들을 장식했던 일련의 강력한 대한방위공약을 선물로 제공한 듯하다.
『박대통령의 성격으로 보아 10·26이 아니었더라면 결국 핵무기를 갖고야 말았을 겁니다. 포기각서는 썼더라도 핵무장선택권(옵션)까지 포기한 것 같지는 않아요.』
한 인사는 또『박 대통령이 핵 개발 가능성을 공언한 것도 미국의 핵우산을 좀더 불잡아 두려는 의도적인 엄포였던 것 같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당시의 우리 기술수준으로는 플루토늄을 어디서든 훔쳐내지 않는 한 단기간 내 핵무기 보유는 어려웠다는 진단이 그 근거였다.

<76, 77년 계약취소>
취재 중 만난 한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실에 프랑스제 중수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시절 프랑스를 오가며 핵 관련기술을 익힐 때 기념으로 얻어 온 소량의 샘플로 「오 루르드 드 조에(조에 원자로의 중수. 조에는 지명)」라고 표기된 투명한 플래스틱에 싸여 있었다. 중수는 플루토늄에의 접근이 보다 쉬운 중수형 원자로에서 감속재로 쓰이는 액체로 제조과정이 극치 까다롭다. 물론 우리는 지금도 중수를 만들 능력이 없다. 『73년께부 터 프랑스의 상고방(SGN)사와 비밀교섭을 벌였지요. 재처리시설을 갖추기 위해 실제용역을 맡겼습니다. 교섭과정에서 그 회사의 지로라는 실무책임자와 많이도 싸웠어요. 이런 복잡한 공장을 설계하려면 개념설계·기본설계·상세설계의 세 단계를 거처야 합니다. 기본·상세설계 만으로 끝나는 일반 공장보다 한 단계가 더 추가되는 셈이지요. 개념설계를 통해 재처리공정의 기본 데이타가 나오고, 기본설계 단계에서는 이 데이타를 이용해 개략적인 공정도를 얻을 수 있어요. 마지막 상세설계를 끝내야만 각 부문의 세세한 장치·설비 디자인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74년10월 세 단계 중 첫번째의 개념설계가 끝났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때 프랑스측이 보내온 개념설계서는 현재 국내에 두 부가 보관돼 있습니다. 그중 한 부는 제가 갖고 있지요. 우리의 귀중한 역사자료 아닙니까.』
원자력연구소는 이해 11월 별도로 SGN사와 재처리시설기술용역 및 공급계약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했다.
75년 1월15일에는 같은 프랑스의 CERCA사와「핵연료성형가공 연구시설 공급계약」이 체결됐다. 이 해에 벨기에와는 「혼합핵연료가공 기술도입」계약이 이루어졌다. 일은 우리측의 의도대로 지극히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75년4월 SGN사와 재처리시설 계약이 정식으로 체결된 뒤 프랑스 원자력청(CEA)은 국제규약에 따라 원자력시설 안전보장 차원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정식교섭을 시작했다. 우리가 재처리시설을 도입하려 한다는 사실이 공개리에 핵 강대국들의 도마위에 오른 것이다.
『올년말께 프랑스측에서 계약취소를 하자고 나왔어요. 자기들도 미국의 압력에 도저히 버티기 어려웠던 거지요. 재처리시설의 개념설계는 이미 끝났고 기본·상세설계에 착수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는 계약파기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사정을 뻔히 알면서 말이에요.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대신 위약금은 물지 않는 조건으로 해서 귀책사유는 우리에게 있는 식으로 계약을 파기했습니다. 그날이 76년 l월23일이었습니다]
벨기에와 함께 추진 중이던 혼합핵연료사업 쪽도 국제적 압력을 이기지 못해 77년 11월11일 공식 중단됐다.

<일선 플루토늄생산>
70년대 중반을 고비로 핵무기를 향한 직행코스를 밟으려던 박 대통령의 야심은 좌절된 셈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고 우회코스를 모색해 밟아나가기 시작한다.
『빵 굽는 기계를 통째로 들여오려다 다른 빵가게 주인들이 뭇매를 놓아 기계도입에 실패한 격이지요. 그러자 다음에는 기계의 부품과 주변기술부터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얻어내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어요. 총론부터 시작하는게 안되니까 각론으로 파고 들었다고나 할까요.』
재처리시설도입이 실패로 끝나자 프랑스로부터 얻어놓은 차관이 공중에 뜨게됐다. 우리측은 이 돈으로 우라늄 정련시험시설, 변환시설, 조사 후 시험시설 등 비교적 덜 민감한 관련시설들을 도입했다. 이즈음부터「플루토늄」 「재처리」 등의 용어를 입에 올리는 것은 국내정부관계자나 학자들간에는 아예 금기가 되다시피 했다. 미국의 경고가 현실화된 것이다. 하지만 바로 같은 시점인 75 12월6일 이웃 일본은 나카무라라는 학자의 노력으로 순 일본산 플루토늄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일관된 정책과 외교력, 미국의 유화정책이 빚은 결과로 많은 국내학자들이 지금도 울분을 감추지 못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노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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