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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관위 사무총장|혼탁 감시하는 선거"실무총책"|권력과는 거리 먼 음지의 차관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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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3일 오전10시 헌법재판소가『정당연설회의 경우 무소속후보에게도 같은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 한 위헌이다』는 「조건부 위헌결정」을 어렵사리 내리게 되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처는 초비상이 걸렸다.
7일 공고 후 벌써 수십차례 정당연설회가 실시 된데다 곳곳에서 『무소속에게도 개인연설회를 허용해야 할 것 아니냐』는 항의가 빗발치고있었기 때문에 선관위로서는 한시도 보완조치를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봉규사무총장은 그러나 오전10시 헌재판결이 내려지기도 건에 미리 결정내용을 전해듣고 신속히 결정문 입수를 지시하는 한편 윤관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9인 전체회의 소집연락을 내려보냈다. 대부분이 현직 법관이거나 변호사인 선관위원들은 일부 지방에서 업무를 보던 사람들까지 포함, 회의시간인 오후3시까지 도착했고 3시간30분간의 난상토론 끝에『무소속도 개인연설회를 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세부적인 절차와 규칙을 보완해 각 지역선관위에 지침을 내려보낸 것은 다음날 오후. 결정권자의 명령이 떨어지면 빠른 통신수단을 통해 사방팔방으로 전달되는 행정부나 기업조직과 비교하면 「매우 원시적」이라는 비판을 받을만하지만 선관위로서는 이례적으로 신속한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인력·장비 태부족>
합의제 헌법기관인 중앙선관위의 「9개의 머리」가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데도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업무성격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해 모든 운영이 법률과 명령·규칙·지침에 따라 철저하게 공문서에 의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어진 임무의 중요성에 비해 보조·집행기관인 사무처의 인력과 장비가 미비해 고감도 정보유통사회에 계속 뒤늦게 적응할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이라는 자리는 『한 기관의 장이면서도 빚이 나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역대 총장들은 입을 모은다. 사무총장은 법적으로 9인 중앙선관위원을 보좌하기 위해 존재하며 중요업무는 모두 선관위원장의지시를 받아 집행하는 「음지의 자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자리는 국회 사무총장, 대법원 행정처장, 헌법재판소 사무처장과 비슷한 성격이나 국회와 대법원의 사무처 총수는 장관급인 반면 헌재와 중앙선관위의 그것은 차관급이라는 차이가 있다. 같은 헌법기관이지만 행사하는 권력(?)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차별대우다.
사무처직원은 중앙의 1백34명을 포함해 15개 시·도, 3백8개 구·시·군 하부단위에 모두 1천6백5명으로 사무처는 자기 몸집의 50배이상이 되는 「머리」들을 모셔야 한다. 지금과 같은 선거 때는 내무부소속(주로 구·시·군청) 공무원들이 단속반원으로 도와주지 않으면 업무가 불가능하다.
중앙선관위는 내무공무원의 연고지 배치를 피하고 투표구선관위원 9천여명의 협조를 받아 「공명선거 단속」에 나서고 있으나 행정공무원 투입에 따른「불공정 비난」의 소리가 불식되지 않아 고민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분야가 그러했듯이 중앙선관위도 정치권력의 변화와 정치상황의 부침에 따라 법령의 규정과 관계없이 「외부로부터의 위상결정」이 이뤄졌다. 그러나 6공화국이 들어서고 제도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선관위는 상당한 수준의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대부분의 역대 중앙선관위사무총장은 선관위원장과 함께 권력과 정치권으로부터 「선거 및 정당관리 업무의 독립」을 따내기 위한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시대의 변화」가 선관위의 독립을 가져다주었다고 봐야한다.
현 김총장의 전임이었던 한원도 전 총장(현재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은 법제처 법제조정실장으로 외부임명 케이스지만 선관위의 법적 독립과 자율권 확보에 있어 획기적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는다.
86년2월 5공권력이 시퍼렇게 살아있었던 시절, 총장에 임명된 그는 「법제 귀신」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중앙선관위의 내부조직 규율권을 헌법 개정에 반영시킨 장본인이다.

<5공 초 한때 막강>
현행 헌법 제7장 선거관리 장의 114조6항에 『중앙선관위는 법령의 범위 안에서 선거관리·국민투표관리 또는 정당사무에 관한 규칙을 제정할 수 있으며,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내부규율에 관한 규칙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을 관철시킨 것이다.
87년 6·29선언 후 직선제개헌 줄거리로 여야가 합의 헌법을 만드는 과정이었지만 한 총장의 법 감각과「로비」가 없었다면 중앙선관위는 여전히 내부 인사문제에서조차 행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선관위측은 앞으로 선거·국민투표·정당사무관리도 시대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법령의 규율을 벗어나 선관위 내부규칙으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장기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아직도 야당 일각에서는13대 대통령 선거를 컴퓨터부정선거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한 당시총장은 『선관위는 13대 대선 때 컴퓨터를 한대도 보유하지 못했다』는 확실한 알리바이를 대고 있다. 유명한 서울구로을 「부재자투표함 운반 부정사건」에 대해서도 문제의 투표함을 그대로 선관위 지하실에 보관토록 지시해 아직까지 개표가 안된 상태로 남아있다. 선관위 한 관계자는 『예산도 문제지만 정당간 극도의 대결의식과 선관위에 대한 확고한 국민적 신뢰가 선행되지 않는 한 부정시비의 빌미를 줄 수 있는 투·개표 업무의 전산화는 요원하다는 「웃지 못할」설명을 하기도 했다.
한 총장이 법률주의와 정치중립으로 중앙선관위의 실질적 위상제고에 기여했다면 4대 정관용 총장은 80년 8월 신 군부 권력장악기에 국보위 사무처장으로부터 자리를 옮겨와 막강한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다.
정총장은 취임식장에 실세 권력이었던 보안사 권정달 대령(나중에 민정당 사무총장)까지 초청해 위세를 과시했는데 81년 3·25 11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실질적인 선관위원장 역할을 했다는 뒷소리를 들었어야 했다. 업무 스타일이 「군인식」이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지만 63년 창설이래 예산과 인력보강에 언제나 찬밥 신세였던 중앙선관위의 살림살이를 특유의 정치력으로 2배 가까이 늘린 공은 인정되고 있다. 그가 재직하던 당시는 선관위 전체회의에 올리는 사무처 검토 안이 단일 안이었고 대부분 그대로 채택돼 위원회와 사무처 사이의 위상이 역전된 게 아니냐는 얘기도 돌았던 시절이었다. 현재는 유권해석 질의에 대한 사무처 검토초안이 갑·을, 심지어 병세 등의 복수안을 올리고 있으며 그나마 전체회의에서 수정되는 경우가 많아 사무처는 말 그대로「보조기관」의 제 위치를 지키고 있다. 정 총장은 81년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12대 대통령선거와 이어 11대 국회의원선거를 잘 치러낸 「공로」로 승승장구했던 유일한 총장이다..
5공 시절 초반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도 그랬지만 72년 이후의 유신체제 때는 선거라는 게 보잘것없었다. 정치는 없고 행정만 있었던 시절이었다. 완전한 양당체제로 한 선거구에서 2인을 뽑는 국회의원 동방당선 시대였고,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선출하는」(간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출은 정당공천이 허용되지 않는 무소속 후보간 경쟁이어서 전혀 선거관리의 긴장감이 없었다.

<유신 땐 태평세월>
2대 이긍호총장은 이 시기에 7년간「장기집권」했고 이 총장과 함께 중앙선관위 창설멤버였던 정경묵씨가 78년 3대 총장에 취임했으나 80년 「공직자 강제해직」사태 때 잘리는 비운을 맛봐야했다. 대부분의 총장들이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으로 승진·임명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는 현재 선관위 퇴직자들의 모임인 선지회 회장직을 6년째 맡고 있다.
63년l월21일 위원회 창설당시는 사무국이었던 직제가 67년 사무처로 승격돼 비로소 사무처장(정년에 사무총장으로 개칭)자리가 생겼다.
해군소장 출신이었던 초대 김영철 총장은 67년 국회의원 선거 때 『박정희 대통령은 공무원신분이므로 선거지원활동을 할 수 없다』고 유권해석을 내린 사광욱위원장의 권력에 맞붙는 소신결정을 보좌하느라 마음고생을 여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71년 박정희-김대중의 치열한4·27대통령 선거전을 치른지 불과 5개월만에 고혈압으로 순직했다.
중앙선관위 창설 때 주사로 출발, 현직에 오른 김봉규 7대 총장은 선관위 사무처의 가장 시급한 과제를 유능한 인력의 확보로 꼽고 있다. 총무처가 일괄 선발하는 7급 공무원을 다수 확보하고 지방공무원의 중앙선관위 전출기회를 확대하는 일은 시급히 이뤄져야 할 과제이며 장기적으로는 국회 입법고시 같은 선관위 자체의 고급공무원 충원체제가 완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영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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