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한·미 FTA보다 더 큰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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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과정을 통해 한국정치의 이념 분포도에는 예전과 다른 변화가 있었다. 노무현.김대중.이명박.박근혜는 FTA 체결의 찬성 편에 함께 섰으며 유력 신문들도 예외 없이 이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변화가 일과성 예외로 끝날지 아니면 선진화를 위한 개방화로 이어지며 국가 발전전략의 중심세력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다만 보수와 진보로 양극화된 이념갈등에 오래 시달려 온 국민으로서는 소수의 이념집단에 의해 좌지우지됐던 민주화 이후의 한국정치에서 비로소 국민 다수의 생각, 즉 상식에 근거한 중심세력의 출범을 보게 되지 않을까 기대를 갖게 되었다.

한.미 FTA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은 선진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치열한 국제경쟁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긴박한 국민적 요구가 동시에 충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에 비교적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넘어야 할 더 큰 과제는 이념적 양극화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중심세력의 성장이다. 특히 극단적 독선과 교조주의가 그 어느 영역보다 난무하는 통일.대북정책 분야에서는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확고한 이념적 중심세력의 등장을 기대해봄 직하다.

근래에 한나라당은 지난 몇 년 국민에게 제시하였던 햇볕정책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수정해 나가겠다는 변화된 자세를 보였으며, 그로 인해 이른바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의 가능성이 다소 커지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경계해야 할 점은 통일정책의 목표와 방법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혼동하는 것이다. 햇볕정책의 기본 논리는 추위에 잔뜩 움츠린 북한으로 하여금 외투를 벗고 긴장을 풀며 평화를 위한 대화와 협력에 응하게 하려면 우선적으로 따뜻한 햇볕을 쬐게 하자는 것이다. 그동안 이러한 논리는 북한 동포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라고 하는 공감대와 겹치면서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햇볕을 쬐이는 그 자체는 방법일 수는 있어도 궁극적 목표가 될 수는 없다. 통일정책의 목표인 새로운 남북관계와 민족통일로 향한 청사진과 전략이 무엇인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 이루지 못하고 햇볕정책이라는 방법만을 강조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념적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20년 전 민주화를 위한 이른바 '1987년 체제'의 출범과 독일 통일로 시작된 냉전의 폐막이란 전환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소야대의 13대 국회를 중심으로 국민 여론을 광범위하게 수합하여 성안시켰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국가체제의 완전한 통일은 7000만 민족 구성원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먼 훗날로 미루더라도 수천 년을 이 땅에서 함께 살아온 인연과 유산을 보전하며 세계 어느 나라와도 견줄 수 있는 사회.경제공동체, 즉 민족공동체를 함께 건설하자고 국민적 합의를 이루었던 통일방안이다. 이에 근거하여 91년 남북 기본합의서가, 그 이듬해엔 비핵화 공동선언이 남북의 합의로 발효되어 우리를 흥분시켰다. 어쨌든 민족공동체 건설을 촉진하는 방법으로의 햇볕정책은 국민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을지라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임기응변으로 통일정책의 목표와 방법이 전도(顚倒)되는 잘못은 경계해야 할 사안이다.

늦게나마 통일정책에 대한 이념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국민적 의식을 다시 가다듬어야 할 때다. 첫째, 개방화가 세계사의 주류임을 인정하고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가 세계 속의 외로운 섬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개방사회의 요건인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하고 성취하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둘째, '한반도 비핵화'라고 하는 민족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민족의 안전을 담보하는 비핵화는 철저히 이행되어야 한다.

'세계 속의 한국'은 무한경쟁 속에서도 계속 뻗어나갈 수 있다는 국민적 자신감과, '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햇볕정책'을 충실히 추진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토대로 하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중심세력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이홍구 본사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