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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란제리, 예술일까 외설일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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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무엇이 요즘 많은 여성으로 하여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 ‘식(食)’을 거부하게 만들었을까. 예술과 외설의 차이! 지금은 흔해 보이는 가슴속의 실리콘 주머니와 비쩍 마른 허리가 실은
코르셋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늑골이 간장을 꿰뚫어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던 19세기 유럽이나 여인들의 발을 기형으로 만들었던 중국의 전족(纏足)만큼이나 이상한 억압은 아닐까.

데비 한 작, ‘육체적 욕망(Carnal Desire)’, 소시지로 만든 란제리를 착용한 모델 촬영, 120㎝Χ75㎝. [일러스트 이강훈]


언젠가 S기업 신입사원들에게 예술과 외설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대답 두 가지. “영화의 경우, 특정 부분만을 반복해서 보고 싶다면 외설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보고 싶다면 예술영화로 볼 수 있다” “몸이 먼저 반응하면 외설이요, 마음이 먼저 반응하면 예술이다.” 그 외에 소수 의견이긴 했지만, “만드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는 답도 있었다.

즉 만든 사람이 성적 욕망의 배출을 위한 단순 자극제로 작품을 만들었다면 외설이겠고, 앞뒤 문맥에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었기 때문에, 혹은 그 작품을 통해 새로운 비판 의식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면 예술 장르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반응이 일어났을 때, 혹은 정서적 교감과 정사적(?) 교감이 동시에 일어났을 경우 장르를 구분하기가 좀 난감하지 않을까.

골치 아프게 외설이니 예술이니 생각할 필요 없이 우리 솔직해져 보자. 데비 한(Debby Han)의 이미지를 보자마자 3초 동안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나. 먼저 주변을 살핀 뒤, 좀 더 은밀하게 가까이 들여다보게 되었을까. 아니면 어떤 생각이 들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을 보이던가.

남성 시선이 만든 美의 기준

나는 이 작품을 보자마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경우 ‘먹고 싶다’는 표현은 조심스럽게 써야겠지만. ‘먹다’라는 단어에는 많은 사전적 정의가 있어서다. 우리는 (음식)을, (마음)을, (나이)를, (욕)을, (뇌물)을, 그리고 속된 말로 (여성)을 먹을 수도 있다. 특히 마지막 경우는 12번째 쯤 정의에 해당되는데, 영어의 ‘eat’도 같은 뜻의 속어로 사용된다. 여기서 내가 사용한 ‘먹고 싶다’는 단순히 음식물을 섭취한다는 의미다.

작품 속 모델이 착용한 란제리는 그 유명한 독일 소시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아, 재료를 이제 알아보셨구나). 내가 독일이란 나라에서 밟은 첫 도시는 13세기부터 맥주를 만들어 왔고 그 유명한 맥주 벡스(Becks)의 본산지인 브레멘(Bremen)이었다.

거리에서 맥주와 소시지를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각종 독일 소시지로 만들어진 란제리를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시원한 맥주가 먹고 싶어진 거다. 브레멘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8kg이 쪘는데, 복스러워졌다는 긍정적 반응을 보인 분은 부모님뿐이셨다. 대부분은 나를 자기관리가 허술한 한심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마음껏 먹고도 사진의 모델처럼 날씬한 허리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를 유지한 채 말이다. 이러한 질문과 이에 대한 비법들은 인터넷 최고의 검색순위를 달린다.

이런 미(美)의 기준은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풍만한 가슴은 젖을 많이 생산해낼 것이고 수유(授乳)에 유리할 것’이라는 남성들의 그릇된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실제로 젖의 분비는 유선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가슴의 크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한편 ‘출산할 때 고등동물의 큰 머리가 통과하려면 골반이 커야 하기 때문에 통통한 엉덩이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이라고 하는데, 잘록한 허리는 가슴과 골반을 더 풍만하게 보이도록 하기 때문에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한다.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시선이 오늘날, 이상화된 여성의 몸을 이미지화했다는 이야기다.

멀쩡한 여성 잡는 미녀 이미지

재미있는 것은 실제 수유를 하고 난 여성들의 가슴은 그렇게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채 탄력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출산한 여성의 허리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언 리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남성들의 시각에 의해 이상화된 이미지들이 스크린 위로, 잡지로, 광고로 퍼져나가게 되면서 사람들의 무의식을 장악하게 되고 멀쩡한 여성들마저 자신의 몸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여성들은 풍만한 가슴을 위해 브래지어에 패드를 대는 것은 물론 가슴확대 수술도 불사한다.

나올 곳과 들어갈 곳을 먼저 정하고, 몸의 지방을 알맞은 위치로 옮기는 수술까지 나왔다.
수술이 두려운 여성들이 손쉽게 선택하는 방법이 바로 먹는 것을 조절하는 것, 다이어트다. 공자는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 두 가지를 식(食)과 색(色)이라 했다.

그런데 무엇이 요즘 많은 여성으로 하여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 ‘식’을 거부하게 만들었을까. 예술과 외설의 차이. 지금은 흔해 보이는 가슴속의 실리콘주머니와 비쩍 마른 허리가 실은 코르셋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늑골이 간장을 꿰뚫어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던 19세기 유럽이나 여인들의 발을 기형으로 만들었던 중국의 전족(纏足)만큼이나 이상한 억압은 아닐까.

헐벗은 수퍼모델의 사진이 붙여진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당신의 식욕을 관장하는 뇌의 ‘시상하부(視床下部)’인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사회적 코르셋과 전족인지 한번쯤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데비 한의 이미지는 적어도 당신에게만큼은 예술로서의 기능을 훌륭히 수행한 셈이다. 나의 몸이 예술의 영역인지, 외설의 영역인지, 혹은 잠시 타인의 욕망의 장에 머물다 변기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배설의 영역인지.

글 김지은(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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