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불·평준화 최대 피해자는 가난한 집 공부 잘하는 자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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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불정책과 평준화의 가장 큰 피해자는 가난한 집의 공부 잘하는 자식입니다. 사교육 문제는 3불정책을 고수한다고 풀릴 문제가 아닙니다. 대안을 찾아주세요."

25년째 경찰 공무원으로 근무 중인 원유석(49) 경위는 13일 '세 자녀 중 두 명을 특목고에 보낸 말단 공무원이 대통령께 드리는 글'을 본사에 보내왔다. A4용지 10장 분량(1만3729자)의 긴 글에서 3불정책(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의 폐지를 호소했다.

원 경위는 서울의 일선 경찰서에서 근무 중이다. 그는 전라도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집의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경찰에 투신했다. 원 경위는 기자에게 글을 쓴 동기에 대해 "공부 잘하는 애들의 의욕을 꺾는 이런 제도는 바꿔야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원 경위의 큰딸과 아들은 각각 외고와 과학고에 다니고 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학원에 많이 보내지도 못했지만 누구 못지않게 교육을 잘 시켜왔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지난달 고3인 딸이 수능 모의고사를 보고 집에 와 펑펑 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예전과 달리 딸이 대학에 가는 2008학년도에는 수능 문제 하나 차이로 등급(1~9등급)이 갈리고, 대학이 결정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수능 점수도 알 수 없어 진짜 실력을 파악할 수 없는 교육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게 됐다.

이후 며칠 밤을 고민했다. 아이들이 가난해도 공부만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가 훌륭한 직장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마침내 용기를 내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대통령의 생각을 바꾸려면 직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원 경위의 글에는 애틋한 부정(父情)이 깊게 묻어나 있다. 또 자식들을 키우면서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폭넓게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대통령님'이란 호칭을 써가며 간곡히 부탁하는 형식을 취했다.

◆ 다음은 원 경위 글의 요약="대통령님, 솔직히 말단인 제 월급으로는 벅차게 살아왔습니다. 애들 학원비로 지출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지난달 과학고에 합격한 아들을 데리고 선영에 갔습니다. 자식을 대학에 못 보낸 한을 품고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군요. 못다한 소원을 손자가 이루려 합니다.

우리 교육은 이제 정말 달라져야 나라가 삽니다. 대통령님께서 그토록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3불정책은 불합리한 정책입니다. 기여입학제는 있는 집 자식이라고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을 무턱대고 입학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느 학교나 똑같다고 주장하면 지금 세상에서는 바보가 됩니다. 그 차이만 인정해주면 됩니다.

수능에서 한두 문제 차이로 등급이 갈립니다. 학생들 표현을 빌리면 천당과 지옥입니다. 수능에서 좀 실수했어도 실력대로 시험을 치러 떨어지면 원이 없겠는데 이마저 본고사가 없으니 방법이 없습니다. 3년을 공부밖에 모르고 살아온 불쌍한 우리 자식들은 여기서 좌절합니다. 3불정책과 평준화의 가장 큰 피해자는 '가난한 집의 공부 잘하는 자식'입니다.

이들이야말로 '가문의 영광'을 재현해야 할 가장 절박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공정하고 정당한 경쟁의 원칙이 사라진 제도하에서 이들이 가장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사랑하는 대통령님. 교육의 원칙은 학생들이 노력한 만큼 인정받는 것입니다. 불합리한 제도가 계속된다면 이 땅의 수많은 미래의 빌 게이츠가 꿈을 잃고 스러져 갈 것입니다."

한애란.구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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