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Blog] 실화가 아닌 척 혹은 실화인 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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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유해진(37)은 요즘 충무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알짜 배우다. 지난해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받은 '왕의 남자'의 광대 육갑이나 '타짜'의 전문 도박꾼 고광렬 등 출연작마다 개성 있는 연기로 극을 풍성하게 한다. 주연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명품 조연'이란 별명을 얻었다. 지난달 말 개봉한 코미디 '이장과 군수'에선 영화 데뷔 10년 만에 주연도 맡았다. 말썽만 부리는 시골마을 이장 춘삼(차승원)의 상대역인 군수 대규로 나온다.

영화에서 대규는 자나 깨나 고향의 발전과 주민의 이익을 생각하는 헌신적인 인물이다. 그는 방사성폐기물처리장(방폐장)을 유치하고 거액의 보상금을 받아 낙후된 고향을 발전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힌다. 그러나 지역 유지를 자처하는 악덕 사업가(변희봉)는 순진한 주민을 선동해 격렬한 반대시위를 일으킨다. 특혜 청탁에 응하지 않고 고지식하게 원칙을 지키는 군수를 제거하기 위해서다.

이런 설정은 2003년 전북 부안군에서 벌어진 사태와 묘하게 겹친다. 대규의 모습은 김종규 당시 부안군수를 떠오르게 한다. 이들은 방폐장 유치를 소신껏 신청했다가 반대파에게 고향을 팔아먹은 '매향노'라는 비난을 받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구체적 상황은 다르지만 영화에 나오는 군수 폭행사건이나 폭력시위.주민투표도 부안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영화사에선 '이장과 군수'를 홍보하며 부안과 관련해선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방폐장 반대파를 실제와 달리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영화 내용 때문인 듯하다. 명예훼손 소송도 걱정됐을 것이다.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실화를 소재로 했든 아니든, 창작과 표현의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 그럼에도 근래 있었던 민감한 사건을 편향적으로 표현한 대목에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반대로 실화와 관계가 없으면서 의도적으로 실화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영화가 있다. 12일 개봉하는 '극락도 살인사건'이다. 김한민 감독이 1980년대 후반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영화와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별별 흉흉한 소문이 '카더라 통신'을 타고 떠돌 때여서 그런 말이 돌았을 법도 하다.

그러나 영화와 같은 끔찍한 살인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외부와 고립된 섬에서 모두가 죽는다는 영화의 설정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10개의 인디언 인형'과 유사하다. 그만큼 영화는 사실성보다 추리물에서 흔히 나타나는 비현실적 긴장감에 크게 기대고 있다.

두 영화를 보며 영화와 실화의 함수는 풀기 어려운 고차원 방정식과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실화가 영화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일까. 오답은 많지만 정답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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