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선의역사를바꾼명차] '딱정벌레' 비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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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극심한 경제 공황기였던 1933년. 독일 정권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국민에게 약속했던 번영을 이루는 방법으로 자동차 전용도로인 아우토반을 건설한다. 그리고 모든 독일인이 이 도로를 달릴 수 있는 국민의 자동차를 만들어야겠다는 구상을 한다. 33년 8월 히틀러는 당시 자동차 설계의 천재로 통했던 페르디난드 포르셰 박사를 만나 국민차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후세들은 이 극적인 순간을 '천재와 악마의 만남'이라고 평한다.

"포르셰 박사! 나의 독일 민족을 위한 국민차의 최고속도는 시속 100㎞ 정도 되고, 기름 1ℓ로 12㎞를 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엔진은 얼지 않아야 합니다. 독일의 겨울은 매우 춥고, 국민 대다수는 차고가 없습니다. 이 차는 네 사람 이상이 탈 수 있어야 하고, 1000마르크를 넘으면 안 됩니다."

당시 오토바이 값 정도의 자동차를 만들라는 억지였다. 베를린 올림픽이 열렸던 해인 36년 10월 포르셰 박사는 3대의 소형차를 완성해 히틀러에게 납품했다. 괴상하게 보이는 딱정벌레 모양의 국민차가 완성된 것이다. 히틀러는 곧 70일간의 성능시험에 들어갔고, 매우 흡족해 했다. 히틀러는 이 차를 kdf(kraft durch freude:즐거움을 통한 게르만 만족의 힘)라고 이름지었다. 나치당은 자동차 보급책의 일환으로 폴크스바겐 구입 우표 900마르크어치를 산 사람에게는 폴크스바겐을 한 대씩 주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후 겨우 첫 생산에 들어갔던 폴크스바겐 공장은 군용차와 탱크 생산 공장으로 변했다. 우표를 팔아 모은 돈은 전쟁에 사용됐고, 만들어 놓았던 몇백 대의 차는 모두 나치군에 징발당해 군 장교 작전차로 쓰였다.

전쟁에 패한 독일인들은 폴크스바겐을 다시 만들었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독일인의 기술과 노력을 기울여 만든 폴크스바겐은 연합국들로부터 그 성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4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대량생산에 들어가면서 세계로 팔려나갔다. 히틀러는 독일을 파괴했지만 그가 생각해 낸 폴크스바겐은 파괴된 독일을 짧은 기간에 경제대국을 일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폴크스바겐 비틀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이 딱정벌레차는 이후 30년 동안 모델을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채 1900만 대를 본국에서 생산했고, 2003년 멕시코로 공장을 옮겨 2500만여 대라는 최고의 생산을 기록했다.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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