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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기자의뒤적뒤적] 콧날이 시큰…가슴이 뭉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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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희망 예보 오늘은 맑음

박경학 외 21명 지음, 샘터

"삶은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의 합계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절실하게 희망해 왔는가의 합계다."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이랍니다. 어깨 위의 햇살이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지던 날, 이 구절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곰곰 생각했습니다. 꿈꾸고 희망할 능력이 있다는 것의 의미를 말입니다.

목에서 신물이 나도록 라면 국물을 들이키는 것으로 끼니를 떼우며 고학으로 대학에 다니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사귄, 멋진 총각과 꿈 같은 사랑을 키워갑니다. 그러다 연락이 끊기고 보름이 지나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겉봉엔 '검열 필. 수번(囚番) 4095'라 적혔습니다. 고아로 신산한 삶을 살아온 '남친'은 해결사였던 겁니다. 놀라고 실망스러워 떠나려던 그녀는 '스러져가는 장작개비의 불길을 내가 일으킬 수 있다면…'하는 마음에 그를 껴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가시밭길입니다. 남편의 실직이 길어지면서 생활비가 바닥나자 아내는 결혼 예물로 받았던 목걸이를 지폐 몇 장과 바꿉니다. 그 돈으로는 3000원짜리 가짜 목걸이를 사 목에 걸고, 목이 긴 티셔츠를 입고 남편의 눈치를 봅니다. 혹시 알게 되면 마음 상할까 싶어서였지요. 6개월이 지나 재취업을 한 남편은 첫 월급을 받은 날 아무 말 없이 18K 목걸이를 내밉니다. 이 세상어떤 목걸이보다 값진 선물을 받아들고 아내는 목이 멥니다.

동중국해에서 폭풍을 만나 조난당한 선원이 있습니다. 구명정에 매달려 바다를 떠돌다 동사 직전에 구조됐습니다. 선원 21명 중 두 명만 생명을 건졌으니 그야말로 구사일생이죠. 다시는 배를 타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당사자나 직업을 바꾸라 충고하는 친지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죠. 그런데 이 사람, 망설이던 끝에 사고 7개월 후 다시 뱃사람으로 돌아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제부터 나의 삶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날 수 있도록 도와준 동료 선원 19명의 몫이다. 선원들을 조난에서 구출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면 옛 동료들이 만들어준 이 목숨과 귀중한 체험을 아끼지 않을 테다." 이런 책임감이 생기더랍니다.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 선생님이 주시는 '불우이웃 돕기' 쌀 한 자루를, 창피함을 무릅쓰고 받았다가 온 가족이 통곡하던 사연 등 눈시울이 절로 뜨듯해지는 이야기만 담겼습니다. 이 책은 28년에 걸친'샘터상' 생활수기 부문의 수상작을 모았거든요.

혹 보통사람들의 기구한 사연이 구질구질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봄을 누릴 수 있다는 것, "그래도 이 세상은 살 만하다"는 고마움을 절절히 느낄 수 있습니다.'9000원의 행복'으로 이만한 게 있을까요.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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