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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냄새 난다지만… 난 육개장 출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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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이젠 ‘고통 없는 죽음’뿐이다”
“미스터 바티야. 당신이 그렇게 우긴다면 이제 남은 것은 ‘고통 없는 죽음(painless death)’뿐입니다.”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막판 고위급 협상이 시작된 지난달 26일 서울 하얏트 호텔 협상장.

캐런 바티야 미국 협상 대표가 회의 벽두에 쌀시장 개방 문제를 처음으로 끄집어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우리 측 대표인 김현종(48) 통상교섭본부장이 싸늘하게 한마디를 쏘아붙였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노무현 대통령을 설득해 한·미 FTA를 결심하게 만들었고, 막바지 협상 테이블에 나서 팽팽한 거래를 마무리했다. FTA에 대한 본인의 확신에다 대통령의 신임이 더해졌기에 가능했다. 신동연 기자.

그가 꺼낸 ‘고통 없는 죽음’이란 표현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생각이라면 남은 1주일 동안 죽어라 협상을 해도 어차피 깨질 것이니 아예 지금 관두자는 얘기였다. 우리 측의 ‘최후통첩’으로 분위기는 일순 냉랭하게 얼어붙었고 결국 미국은 쌀 개방 카드를 거둬들였다.

연장에 연장을 거듭했던 한ㆍ미 FTA 협상의 극적인 타결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온 국민의 시선은 낯선 ‘젊은’ 장관이 협상을 타결로 이끄는 인상적인 모습에 모아졌다. 두꺼운 서류철을 옆에 끼고 비장한 표정으로 협상장에 들어서는가 하면 미국 대표와 함께 협상타결 내용을 당당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김현종이 누구냐”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주세 협상 패소가 내 인생 바꿨다”
김현종 본부장은 노르웨이 대사를 지낸 정통 외교관 김병연(77)씨의 아들이다. 초등학교 3, 4학년을 제외하곤 대학까지의 학창시절을 모두 미국과 일본 등 외국에서 보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한 뒤 같은 대학 로스쿨(통상법 전공)을 졸업하고 1985년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후 4년 동안 미국 월가의 유명 로펌에서 인수합병 전문변호사로 활약하다 8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여동생 미형(43)씨 역시 스탠퍼드 대학 로스쿨을 나와 현재 금호아시아나그룹 수석고문변호사 겸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 본부장이 외교통상부와 인연을 맺은 것은 95년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 대책반 고문변호사를 맡으면서부터. 98년 통상교섭본부가 발족하자 통상전문관으로 자리를 옮겨 유럽연합(EU)과의 주세(酒稅) 판정 등 굵직한 통상분쟁을 직접 맡았다. 당시 어눌한 한국어로 “과, 과, 과장님, 뭐… 무슨 일 좀 맡기실 것 없나요”라며 사무실 이곳저곳을 오가던 모습이 기자와의 첫 조우였다.

그가 국제통상 분야에 전념하겠다고 결심을 굳히게 된 일화 하나.
98년 EU는 한국이 소주(35%)보다 양주(100%)에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것을 문제 삼아 WTO에 제소했다. 한국에 유리하게 돌아가던 상황은 막판에 갑자기 뒤집혔다. EU의 노련한 변호사들이 한국 소주업체들의 홈페이지를 뒤져 수출용 영문 카탈로그에서 ‘소주가 보드카와 비슷한(vodka-like) 주류’라는 구절을 찾아냈다. 이 자료가 제시되자 소주는 위스키ㆍ보드카 등과 다른 약한 술이어서 세율을 다르게 매길 수밖에 없다는 한국의 논리가 무너졌고 결국 패소했다.

당시 한국 측 변론을 맡았다 불의의 일격으로 당했던 김 본부장은 “판정문을 방에 붙여놓고 두고두고 곱씹으며 인생의 승부를 여기에 걸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곧바로 WTO에 지원했다. 99년 WTO의 무역분쟁 판결문 등을 관장하는 법률국 수석법률자문관 공모에서 세계에서 모여든 140여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종 선발됐다.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 법률 자문관이었다. 직급도 법률국 변호사 15명 가운데 가장 높은 P-5급(국장급)을 차지했다.
 
■“이중국적자ㆍ병역기피자라고요?
나는 한국인이며 ‘육개장’ 출신입니다”
그는 어느 미국인보다도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생각도 영어로 하고 꿈도 영어로 꿀 정도다. 14세부터 미국의 기숙 중ㆍ고등학교에서 혼자 생활했다. 그의 유일한 벗은 공부였다. 컬럼비아 대학 시절 그는 기숙사 책상 밑에 구두 한 켤레를 놔두고 못을 박아 마루바닥에 고정시켜놓고는 그걸 신고 공부했다고 한다. 자리를 뜨고 싶은 욕구를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그는 억척스러웠다. 학교 내에선 수재로 소문났지만 한국 유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않아 쌀쌀맞은 사람으로 통했다. 자립심과 경쟁심이 너무 강하다 보니 독불장군이란 평도 들었다.

그를 친미주의자로 몰아붙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국익’ ‘애국심’ 같은 단어를 즐겨 쓴다.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의 에센스(essence)가 있는데, 내게는 국익과 국가관이 에센스”라고 강조한다.

한때 국적 시비가 일자 유학생 시절부터 간직해온 낡은 한국여권 한 뭉치를 꺼내 보이며 “나는 엄연한 한국인”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유학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대사관을 수없이 왔다 갔다 했던 경험이 이번 협상에서 비자면제 프로그램을 적극 추진하게 된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유학 시절 남모르게 당했던 설움이 오히려 조국을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말을 잊지 않기 위해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한국만화를 열심히 구해다 읽었다고 한다.

그는 86년 자진해 군에 입대했다. 당시 6개월간 복무한 뒤 장교(소위)로 전역했기 때문에 ‘육개장’이라 불렸던 석사장교(예사 8기) 출신이다. 칼바람으로 유명한 경북 영천의 3사관학교에서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는 군가를 부르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외국생활 탓에 한국어를 세련되게 구사하지 못하는 게 그의 약점이다. ‘버터 냄새가 난다’는 소리를 듣는다. 대화를 하는 데 지장은 없지만 어휘의 뉘앙스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정상회담을 마치고 화기애애한 대화를 하며 걸어가던 두 정상의 모습이 보기 좋았던지 배석했던 김 본부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두 분이 죽이 잘 맞으시네요.” 순간 통역이 이 뜻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고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함께 배석했던 반기문 당시 장관이 조용히 귓속말로 “그 표현은 의전용어로는 적합하지 않네”라고 조언하자 그는 멋쩍게 웃었다.

그는 말실수를 걱정해서인지 본부장 취임 이후엔 언론과의 접촉을 꺼렸다. 그래서 기자들 사이에선 ‘베일에 싸인 사람’으로 불리기도 했다.

홍병기 기자 klaat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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