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 우산 도우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1면

15년 전 봄이었다. 퇴근을 앞두고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빗줄기를 실로폰 소리로 여기며 걷던 중이었다. 키가 멀쑥한 남자가 갑자기 우산을 씌워 줬다. 순간 놀라서 "누구세요"하고 물었다. "봄비 맞으면 감기 들어요."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그 남자의 눈빛이 봄 시냇물처럼 참 맑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연이었던지 그 일을 계기로 우린 하루에 한 번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서른이 되기까지 어지간한 연애 한 번 못 해본 나는 급속도로 그와 가까워졌고, 결국 그와 장래를 약속했다. 그는 사업이 부도나서 당분간 결혼식을 올리기 어렵다고 고백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방 한 칸을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지만 형편은 좋아지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낳고 직장을 그만둔 탓에 일용직으로 일하는 그의 수입으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마냥 남편만 믿고 기다릴 수도 없었다. 직장을 전전하던 끝에 미용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주변에선 여자가 미용 일을 하면 팔자 사납다고 만류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미용학원에 다니며 힘들게 자격증을 취득했고, 차근차근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지금도 미용사로 일하고 있다.

오늘 또 봄비가 내린다. 솔직히 처녀 때 그렇게 좋아하던 봄비가 요새는 반갑지 않다. 남편은 일용직 건설 기술자다. 비 오면 일을 못 나간다. 더구나 일자리까지 구하기 힘든 상황이니 봄비를 무작정 반길 수 없다.

대신 남편은 비오는 날이면 저녁을 해놓고 우산까지 챙겨 미용실 앞으로 온다. 마지막 손님이 돌아간 뒤 톡톡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돌아보면 남편이 우산을 받쳐들고 손짓을 한다.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하다. 그는 내 손을 따뜻하게 덥혀 주기 위해 한쪽 손으론 우산을 들고 한쪽 손은 호주머니 속에 넣은 채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단다. 그런 그 덕분에 겨우내 나는 장갑이 필요치 않았다. 가난하지만 십년 넘게 내 우산 도우미를 자청하는 남편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세상을 뿌옇게 물들이던 황사도 봄비에 쓸려가듯 우리에게도 반드시 좋은 날이 오리라 믿는다. 봄비 그친 뒤 햇살이 더 맑은 것처럼….

(김봉자.45.남양주시 평내동.미용사)

20일자 주제는 자장면

분량은 1400자 안팎. 성명.주소.전화번호.직업을 적어 4월 16일까지로 보내 주십시오. 채택된 분께는 원고료를 드리며, 두 달마다 장원작 한 편을 뽑아 상하이 자유여행권 2장을 드립니다. 상하이 왕복 항공편과 호텔 2박 숙박을 제공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