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해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838년 중국 양저우(揚州)에는 해안가에 좌초한 일본 사절단이 당도했다. 일본 최초로 대사(大師)라는 지위를 받은 엔닌(圓仁)이라는 승려도 그중 하나였다. 이들은 일본이 당(唐)과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 보낸 견당(遣唐) 사절단이었다.

엔닌이 그 이후 중국을 떠돌면서 남긴 일기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巡禮記)'에는 신라인이 자주 등장한다. 전 일기를 통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외국인이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당에 거주하고 있던 신라인은 산둥(山東)과 중국 내륙 운하 지역 곳곳에, 요즘 말로 치면 일종의 조계(租界)를 만들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내륙 운하의 각종 거래에 참여하고 서해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각종 상거래에 적극 뛰어드는 존재였다. TV 드라마 '장보고'에서 잘 묘사됐듯이 이들은 한반도와 중국을 포함해 동아시아 해상의 무역권을 거의 장악한 집단으로 엔닌에 의해 기록된다.

일본에 살면서 같은 배에 올라 엔닌의 통역을 돕던 인물도 신라인이고, 좌초한 뒤 당의 수도 장안에까지 이르는 동안 사절단의 숱한 교섭과 물자 조달을 돕던 이들도 신라인들이다. 장보고의 해상 무역 장악에도 힘입은 바 크지만, 이는 그 전에도 있었던 한반도 사람들의 꾸준한 해양 진출 덕분이다. 말이 신라인이지 실제는 통일신라기에 활동했던 한반도 사람들이다.

바닷길을 오갔던 한반도 사람들의 역사를 보면 우리가 결코 해양을 멀리할 수 있는 민족이 아니라는 점이 많이 나타난다.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윤명철 저.사계절)에 따르면 한반도는 석기 시대 이후 줄곧 바다를 통해 문화를 주고받았으며 고구려가 수(隋).당(唐)과 벌인 전쟁, 불교를 전해 받는 과정 등에서 해양력을 골고루 활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발해 역시 일본과의 빈번한 교류를 대부분 동해 바닷길을 통해 진행했고, 백제 또한 일본과의 교류를 넘어 바닷길을 통해 현대 중국의 랴오닝(遼寧) 지역을 경영했던 기록도 있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2일 맺어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한반도 사람들이 더 큰 바다로 나가기 위한 중요한 교두보다. 해양 문명을 대표하는 미국에 더 직접적으로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까지 지속됐던 한반도의 해양력이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명적 의미도 작지 않다. 그 부작용에 따른 농업 분야 등에서의 문제 해결이 꼭 필요하겠지만 해양을 향한 한반도 사람들의 전래적 개방성도 이 즈음에서 다시 한번 되새김 직하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