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2)경호원가족 10·26급보 「공포의 새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피격직전까지도 박정희 대통령은 매우 건강한 편이었다.
작지만 탄탄한 몸이었고, 아침산책과 배드민턴·검도 등으로 꾸준히 건강관리를 해온 덕분이었다. 나안 시력도 1.0으로 양호했다.
76년11월에는 가벼운 위염증세가 있어 당시 내과의학의 권위자로 내시경 검진방식을 국내에 처음 도입했던 서울대 오인혁 박사(지난1월16일 작고)의 진찰을 받았었다. 지금은 종혜씨가 보관중인 박대통령의 일기(76년116월3일자)는 『금조8시30분 국군병원에서 서울대의 오모박사로부터 검진을 받다. 투시경이 식도를 통해 외까지 들어가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었으나 검진결과는 내부가 깨끗하고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아 기분이 후련해졌다』고 적고 있다. 진찰에 동행했던 김병수씨는 『검진 후 대통령이「내 속을 훤히 들여다봤으니 이제 임자들한테는 거짓말을 못하겠다」고 농담을 건넸다』고 회고했다. 술을 지나치게 들지 말라는 충고를 자주 하는 외에는 전담의료진(민헌기 주치의, 김병수 의무실장)은 별로 걱정할 일이 없었다.

<사택은 울음바다>
대통령의 숨을 끊은 치명상은 김재규 정보부장의 제2탄(확인사살)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가슴 위쪽에서 등뒤로 비스듬히 관통한 1탄은 옆자리의 가수 심양의 치마를 적실 정도로 많은 피를 쏟게 했지만 곧바로 절명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당시 의료관계자들은 전한다. 이에 비해 뒷머리에 총구를 바로 대고 쏜 두번째 탄환은 뇌 아랫부분 정맥묶음인 뇌저정맥총(Basilar Pexus)파괴했다. 이 경우 호흡중추가 마비되고 뇌 기능이 즉시 정지된다고 한다.
「대통령 유고」가 일반국민에게 알려진 것은 27일 오전4시10분 정부대변인 김성진 문공부장관의 발표를 통해서였다. 김재규 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는 사실은 3시간여 뒤인 오전 7시20분 공식발표 됐다. 미국에서는 CBS방송이 오전6시(한국시간)에 긴급뉴스로「박 대통령 서거」를 보도, 사건 당사국보다 한시간 이상 앞서서 이를 세계에 알렸다.
기막힌 뉴스내용에 대해 가장 원초적인 반응을 보인 곳으로는 아무래도 청와대 근처 세검정에 있던 경호원거주지(사택)를 꼽아야 할 것 같다.
「경호원 수명 피격사망」이라는 소식에 새벽잠에서 깨어난 경호원 가족들은 서로『누구의 남편이 죽었느냐』며 눈에 불을 켜고 안부를 확인했다. 대통령 수행경호 때는 행선지나 행사내용을 부인에게까지 비밀에 부칠 정도였기 때문에 전날 밤 당직근무자의 가정은 모두 초비상이었다.
『누구네 집 누구 라더라』는 소식이 돌기 무섭게 그 집 안식구의 통곡소리가 잇따랐다. 두 동의 연립주택 중 한쪽에서 정인형·안재송·김용섭·김용태 경호원이 변을 당했고 다른 한쪽에 살던 박상범씨는 처음에는 사망자대열에 낀 것으로 됐다가 뒤늦게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절친한 친구(중정의 전과 강박선호)에게 살해당한 경호처장 정인형씨의 경우 그 즈음 경호직을 그만두고 유정회 쪽으로 진출했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있었다고 한다. 연일 아침 부근 경복고 운동장에서 동네 주민·경호원들과 조기축구(민관 친선차원에서 축구팀이 운영됐다) 를 한 정씨는 평소의 무뚝뚝하던 태도와는 달리 환하게 웃으면서『자, 나 먼저 갑니다. 운동 둘 더 하세요』라며 손까지 흔들어 보이곤 청와대로 출근했다. 그날 정씨와 함께 공을 찼던 전경호원 김종문씨(현 스포츠진홍사장)는 『그이가 동료들에게 마지막 하직인사를 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10년간 두명 면회>
충격의 와중에서도 식자층을 중심으로 박대통령의 죽음을 경위야 어쨌든 나라에 긍정적인 사태로 보고 앞으로의 변화방향을 모색해본 이들도 많았다.
강신옥 변호사(현 민자당의원)는 대통령의 서거소식을 전해들은 순간 『사필귀정이다. 이제는 바로 잡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는74년 민청학련사건의 변호인으로 변론도중『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좋으며, 악법과 정당하지 않은 법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도, 투쟁할 수도 있다. 직업상변호인 석에 앉아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해 피고인 석에 앉아있겠다』는 폭탄발언을 했다가 구속돼 옥고를 치렀었다.
당시 서울대 3학년이었던 심재철씨는『드디어 갔구나. 말로는 이렇게 비참하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고 회상한다. 운동권이던 심씨는 다음해 서울대 총 학생회장을 맡아「서울의 봄」에 한몫 하다. 5·17을 맞게 된다.
온 나라가 뒤숭숭한 가운데 「화무십일홍 권부십년」이 새삼 세인의 임에 떠올려졌다. 박정희란 이름 석자를 파자해『18년만에 어쩌고…』라며 풀이하는 그럴듯한 운명철학이 유행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합동수사본부는 김재규 부장에 이어 김계원 비서실장(10월30일), 이재전 경호실 차장(11월5일)등을 차례차례 잡아들이고 12월 들어서는 드디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12·12사태)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경호실직 원들을 정리하기 위한 철저한 신원 재조사작업도 계속됐다. 10·26당일 당직사령 강태춘씨의 경우 아무리 털어도」먼지하나 나오지 않자 그때까지 10년간의 청와대 면회일지까지 샅샅이 뒤졌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강씨 상대의 면회객은 단 두 명으로 양복재단사와 구둣방점원 뿐이었다고 해서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가족 보는게 소원">
대통령시해사건 공판은 초스피드로 진행돼 80년 5욀20일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피고들의 상고를 기각한 직후인 24일 오전7시를 기해 사형이 집행됐다. 광주사태로 전국이 숨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법정 최후진술에서 김재규 부장의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은『궁정동의 비극이 발전하는 민주대한의 활력소가 되기를 바란다. 유가족 여러분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다』고 말했다. 또 중정 운전기사 유성옥은『가족과 면회 좀 하게 해달라. 한번도 면회 해본 적이 없다. 귀의 고막이 파열돼 계속해 염증을 닦아내고 있다. 이것도 선처해 달라. 지은 죄는 달게 받겠다』고 호소했고 중정 경비원 김태원도 곡괭이자루로 숱하게 얻어맞은 일을 이야기하며 고문으로 억지로 자술서를 썼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김재규 본인의 최후진술은 알려져 있듯이 다른 피고인들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김재규·김계원 등 주요 피고에게는 모두 내란목적살인·내란미수혐의가 적용되었으나 이중 김재규의 최후진술에서만「내란」(본인은 이를「혁명」으로 바꾸어 진술한다)의 구체적 목표가 나온다. <26면에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