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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없고 의사도 없다”/최천식 사회2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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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음력 섣달그믐 리어카 행상을 하던 50대 가장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 5군데를 돌아다녔으나 잇따른 진료거부로 끝내 길거리에서 숨졌다.
해마다 명절연휴,때로는 휴일에도 이러한 일이 드물지 않게 있어왔으므로 그리 놀랄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번 경우는 누가 들어도 「너무했다」는 느낌이다.
『응급병상이 모자란데다 당직 의사가 없다』는 진료거부 변명은 구차스럽긴해도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를 앞에 두고 『(수지타산이 안맞는)교통사고 환자라 받을 수 없다』『입원보증금 5백만원이 필요하다』며 환자를 되쫓는 행위는 분명 인술과는 거리가 너무 먼 상술이다.
1년내내 연휴때면 많은 국민들은 『이번 연휴기간 우리 가족중 아픈 사람이 없어야 할텐데』하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연휴를 보낸다.
가족중에 급체환자라도 있어 병원문을 두드리다가 문전박대당하거나 약국을 찾느라 동네를 서너바퀴씩 돌아다닐 때의 절박한 심정을 모든 의료기관 종사자들은 알아야 한다.
보사부는 연휴때마다 전국 의료기관에 휴일 비상 응급 진료대책 마련을 지시하고 이를 제대로 이행치 않을 경우 행정처분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놓아왔다.
이번에도 서울시내 40여개 대형병원등 전국 1백여개 병·의원이 비상근무뿐만 아니라 정상근무에 들어가 연휴응급환자진료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그럴싸하게 발표했다.
그러나 책상머리에 앉아 지시만 내리고 일선병원 현장을 확인하지 않는 안일한 보사행정이 결국 한 생명을 잃게 했고 사실상 국민을 우롱한 셈이 됐다.
사건이 터지자 보사부는 유례없이 신속하게 일선병원에 특별점검반을 내보내는등 후속조치를 취했다고 하지만 어쨌건 사후약방문(?)일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일 뿐만 아니라 사실 그동안 보사행정은 시민들의 편익보다 병원등 의료계의 고층 이해에 기우는 듯한 인상을 주어왔다.
의료사고가 나도 의사들의 형사처벌을 면하게 해주려는 의료사고분쟁조정법 제정 추진이 그렇고 의료기관에 대한 지방세 부과 방침에 대해 보사부가 발벗고 나서 이를 철회시키는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보사부는 국민들이 병원운영 전반에 칼자루를 쥐고 있는 보사부가 왜 이렇듯 진료거부행위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이를 근절시킬만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가 하고 의혹에 가까운 불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이러한 진료거부행위등 병원들의 일방적인 횡포에 대해 국민들이 납득할만한 강력한 행정조치를 내려야 한다.
이와 함께 모든 의료인들은 거창한 의료인 윤리헌장 제정 등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를 가려 환자를 선택하려는 약은 장삿속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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