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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연필, 김남조의 사인펜, 고은의 볼펜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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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나는 연필로 글을 쓴다. 연필이 아니면 한 자도 쓸 수가 없다. 지우개가 없으면 한 자도 쓸 수가 없다. 나는 반드시 지우고 다시 쓰기 때문이다…그래서 내 책상 위에는 저녁마다 지우개 가루가 눈처럼 쌓이고 두어 장의 원고가 늘어난다. 인생은 고해인 것이다.'

소설가 김훈이 자신의 글쓰기 버릇을 적은 글의 한 토막이다. 김훈은 연필만 고집한다. 그래서 그의 가방엔 늘 필통이 들어있고, 필통 안에는 몽당연필 몇 자루와 지우개 그리고 문구용 칼이 나란히 놓여있다. 김훈 특유의 신랄하고 도저한 문장은, 그의 말마따나 '살아서 움직이는 육신의 확실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김훈만이 아니다. 글로써 밥을 버는 작가들에게 필기구는 단순한 필기구 이상의 것이다. 생산수단이자 무기이며, 때로는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어떤 필기구를 집느냐에 따라 문장이, 나아가 문장 안에 담긴 작가의 사상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작가와 필기구라는, 가장 근본이 되는 글쓰기 원리를 묻는 전시회가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관장 강인숙)에서 열린다. 13일부터 다음달 13일까지 전시되는 '지필묵(紙筆墨)의 문화사 전'이다.

전시에는 이광수.이은상.김광균.김동리 등 작고 문인들의 집필 사진과 박경리.박완서.고은.이어령.정진규.이근배.김훈 등 현역 문인들의 집필 도구와 친필 원고 등이 선보인다. 앞서 인용한 김훈의 글처럼, 몇몇 문인은 필기구를 선택한 이유를 밝히는 글도 함께 내놓았다. 이렇게 문인 55명이 전시회에 참여했다.

특히 이근배 시인은 고이 모셔놓았던 명품 문구를 이번에 공개했다. 16세기 조선에서 제작된 벼루와 19세기 청나라의 문진 등 가위 문화재급 명품들이다. 이외에도 정진규 시인은 '나는 몸으로 쓴다'는 제목의 서예 작품을 내놓았다.

역시 가장 흥미로운 건, 작가가 밝힌 필기구 선택의 이유다. 예를 들어 사인펜을 고집하는 김남조 시인은 "사인펜 열두 자루 한 박스를 들여와 원고지 옆에 가지런히 두고 쓰는 일이 작은 행복"이라고 적었고 고은 시인은 "물처럼 흘러오고 흘러가는" 볼펜을 50년 가까이 애용한다고 말했다. 작가의 체취가 만져지는 대목이다.

강인숙 관장은 "작가의 육향(肉香)을 전해주는 집필 도구들을 만나는 기회를 통해 글을 쓰는 행위와 지필묵과의 관계를 되짚어 보고자 이번 전시회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오전 10시30분~오후 5시 개관. 월요일 휴관. 관람료 일반 4000원(학생 2000원). 02-379-3182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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